주체105(2016)년 3월 1일
장편소설 《고요한 격전》

제 2 장

5

사시절 만년설로 덮여있다는 백두산이 가까운 지맥이여서인지 벌방의 들판이나 최뚝에서는 아직 파란 풀밭들이 소나 양들을 불러내고있으련만 압록강상류의 고산지대에는 벌써 첫눈이 무릎을 치게 내렸다. 단풍진 잎들을 채 떨구지 못한 가지들과 다래와 오미자덩굴에도 눈이 더미로 쌓여 소슬한 바람에도 사태처럼 쏟아지군 한다. 토끼며 다람쥐, 오소리들이 눈사태에 놀라 향방없이 허우적거리기도 한다. 그 모양이 우습다는것인지 아름드리고목에서 청더구리며 산까치들이 이 가지, 저 가지 넘나들며 제나름의 청을 뽑는다.

밀림의 그 눈바다를 헤치며 두사람이 씨원스럽게 걷고있었다. 무릎까지 빠지는 숫눈길이건만 무척 몸에 익은 걸음새이다. 등에는 이 계절이면 흔히 보군 하는 이와실이군들처럼 가는 새끼로 촘촘히 엮은 망태들을 졌는데 천으로 둘둘 감은 톱이며 도끼, 바줄들이 유난하다.

강동무를 대신하여 국내공작임무를 받고 나오는 김봉빈과 곽영무다.

봉빈이는 강동무가 이미 마련한 랑림산일대의 비밀근거지를 더욱 확장하는 한편 그 일대 각곳의 조국광복회조직들과 련계하여 조국해방의 대사변을 주동적으로 맞이하는데 적극 이바지할 무장부대들을 더 튼튼히 준비할데 대한 과업을 받고 나오는 길이며 영무는 서울과 강원도일대까지를 포괄하여 조선서부와 중부지대에 나가 국내혁명조직들을 상대로 전민항쟁준비를 위한 정치선전사업을 진행하면서 국내정세를 구체적으로 정찰할데 대한 과업을 받고 어제밤 국경을 넘어선것이였다.

10년전 북주하양주공장을 불바다로 만들어놓고 유격근거지로 들어간 이후 헤여지기도 많이 하고 감격적으로 만나기도 많이 하면서 이제는 련대적으로도 손꼽히는 정치일군으로, 군사지휘관으로 성장한 그들이였다.

그들의 이번 걸음은 특히 여러날동안 사령관동지를 만나 구체적인 가르치심을 받은 련대장으로부터 직접 과업을 받고 떠난것으로 하여 더욱 신심에 넘쳤다.

그들은 뜻밖에도 같이 국내공작을 나오게 된 일도 감격스러웠지만 더우기 가슴울렁이게 한것은 밀영어구까지 바래주면서 하던 련대장의 말이였다.

《다시 반복하지만 사령관동지께서는 우리의 주력부대들은 신속히 국내에 진출하며 지구별로 산중을 차지하고 이미 조직한 각 지방조직의 지도핵심들과 련계밑에 징용, 징병을 기피하여 산중을 헤매며 조선인민혁명군을 찾는 청년들을 비롯하여 광범한 애국청년들을 부대에 받아들여 그들을 무장시키고 훈련시켜 최후결전을 준비하여야 한다고 가르치시였소. 여기에 배합하여 전인민적봉기를 불러일으켜 일거에 적들을 요정내고 나라를 해방하는것이라고 하셨소. 승산이 확고한 작전이요. 문제는 결정적시기에 전체 인민을 항쟁에 불러일으키는것인데 그것도 어려울게 없소. 3. 1인민봉기때 독립만세를 부르느라 수백만이 떨쳐나섰는데 이제 우리가 최후결전을 한다고 해보오. 얼마나 많은 인민들이 항쟁마당으로 달려나오겠는가. 동무들의 이번 걸음이 참으로 중요하오.》

가슴이 후둑후둑 뛰였다.

물론 그들의 국내걸음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였다.

첫걸음은 사령관동지를 직접 모시고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성원으로 력사적인 보천보전투에 참가할 때였다. 그날의 감격과 격정을 눈을 감은들 잊을텐가!

이후에도 무산, 웅기(당시), 경흥쪽으로 여러차례 국내공작과 정찰을 나왔던 그들이였다.하지만 압록강을 건너 고향과 잇닿은 랑림산줄기를 타기는 이번이 처음이였다. 그래서 더 가슴이 뛰고 목이 메여오르는 그들이였다.

배고파 우는 어린 동생들에게 꿀방망이꽃잎을 뜯어먹이던 고향마을의 최뚝은 어디고 류달리 꿩이 많아 봄철이면 해퍼지는 아침녘부터 껑겅껑겅 장끼의 울음소리 유난하던 덩두골은 어디 바루!

배고파 우는 어린 동생들에게 꿀처럼 달달한 꿀방망이꽃잎을 한잎 또 한잎 뜯어 입에 물려주군 하던것은 봉빈의 어릴 때 일이였다.

그의 집은 보잘것없는 산간마을에서도 띠오리같은 돌투성이 오솔길을 따라 한참 더 들어가야 하는 외진 산밑의 오두막같은 초가집이였다. 한여름이면 풀속에 묻히다싶이 하는 그 집옆에도 자그마한 내가 흐르고 내가뚝에는 아름드리미루나무 한그루가 있었다. 해마다 이른봄이면 까치들이 날아와 둥지를 틀군 하여 헌바구니같은 까치둥지가 네댓개나 층층이 얹혀진 미루나무였다.

봉빈이가 여덟살잡히는 해 봄 어느날이였다.

철바뀔 때마다 운신을 못하고 더 괴로와하는 병약한 어머니곁에 매달려 칭얼대는 봉순이와 봉옥이를 보다못해 봉빈이는 한 애는 등에 업고 또 한 애는 품에 안고 집을 나섰다.

때없이 나와 놀군 하던 미루나무밑의 부자집 떡돌만한 어펑바위우에 두 동생을 나란히 앉히였다.

동뚝에는 자주색방망이같은 꿀방망이꽃이 많았다. 봉빈이는 꽃송이들이 실한 꿀방망이꽃 하나를 따들고 두 동생과 마주앉아 이애 입에 한잎, 저애 입에 한잎 꽃송이를 물려주었다.

봉순이는 맛나게 쪽쪽 소리를 내며 꽃송이를 빨았지만 세살잡이 봉옥이는 새가 났던지 도리질을 하며 그냥 떼질이였다.

머리우에서 까치 한쌍이 깍깍거렸다.

봉빈의 머리에 피끗 떠오르는것이 있었다.

까치가 알을 낳지 않았을가? 열알만 낳았으면 닭알처럼 삶아서 동생들한테 먹이고 어머니한테도 드렸으면 얼마나 좋을가. 어머니가 한알만 먹어도 병이 뚝 떨어질것 같은 생각에 봉빈이는 미츨한 미루나무밑둥을 어떻게 톺아올랐는지 몰랐다.

내려다보면 눈앞이 아찔한 아득히 높은 미루나무우의 해묵은 둥지들에까지 일일이 손을 넣었지만 까치알은 한알도 없었다.

너무 서둘렀다는 생각에 맥이 빠진 봉빈이는 한동안 기운을 가다듬고서야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기여올랐던 나무가 내려올 때는 얼마나 힘이 든지 몰랐다.

아름드리인데다 어른키 세길은 넘을 밑둥에 이르렀을 때는 겁이 덜컥 났다. 도무지 내려갈 자신이 없었던것이다.

아래는 우죽뿌죽한 돌판과 나무그루터기들… 떨어지기만 하면 순간에 만신창이 되리라는 생각에 온몸에 땀이 쫙 났다.

마침 옆으로 미루나무굵기 못지 않을 소나무 한그루가 나란히 서있었다. 서까래감으로도 충분할 가지 하나가 봉빈의 발밑으로 뻗어지나갔다. 굵은 옹이들이 있어 그 소나무로는 오르내리기가 한결 쉬워보였다.

봉빈이는 있는 힘을 다하여 다람쥐처럼 날쌔게 소나무가지로 날아내렸다.

너무 긴장하고 혼백이 빠진 봉빈이는 땅에 내려와서도 한동안 정신을 잃다싶이 했다. 그자리에 퍼더버리고앉은채 눈도 뜨지 못했다. 《얘야.》하고 누군가 불러서야 정신을 차렸다.

빈대껍질처럼 납작하게 생긴 밤색모자를 쓰고 승마바지에 까만 명주조끼를 받쳐입은 낯선 사람이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봉빈이를 찬찬히 뜯어보고있었다.

수건을 꺼내여 땀벌창이 된 봉빈의 얼굴을 친절히 닦아준 그 사람은 큼직한 가죽가방에서 불룩한 사탕봉지를 세개씩이나 꺼냈다. 봉빈이와 봉순이, 봉옥이한테까지 하나씩 안겨주었다.

무지개처럼 갖가지 색줄이 엇바뀌며 돌아간 사탕알은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았다.

눈물이 왈칵 쏟아지게 고마움이 북받친 봉빈이는 아직 봉옥이가 태여나기 전해 겨울날 일본사람들의 강제에 못이겨 사냥몰이군으로 끌려갔던 아버지가 어느 험한 벼랑에서 떨어져 억울하게 숨이 진 사연으로부터 시작하여 그 사람이 묻는대로 가정형편을 죄다 이야기했다. 쯧쯧 하고 연방 혀를 차던 그 사람은 봉순이와 봉옥이를 한아름에 안고 제사 앞서서 어머니가 누워있는 봉빈이네 집으로 들어갔다.

어른들끼리 의논할것이 있으니 아이들은 밖에 나가 놀라고 봉빈네 오누이를 방안에서 내보냈다. 봉빈이는 그 사람이 서울의 어느 곡마단에서 바줄타는 재주를 배워줄 나어린 처녀애 하나를 물색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돌아가는 뚜쟁이라는것을 알수가 없었다.

어머니도 몰랐다.

그 사람은 다음날도 찾아왔고 사나흘 지나서도 찾아왔었다.

세번째로 찾아왔던 날 저녁에는 깜짝 놀랄만큼의 돈뭉치를 놓고 갔다.

어머니는 그날 밤에야 도회지에 내다 공부도 시켜주고 달마다 월급도 후하게 준다는 곡마단으로 봉순이를 보내기로 했다는 말을 해주었다.

《안돼요, 요 쪼꼬만 앨 어떻게!》

봉빈이는 당장 봉순이를 빼앗기우기라도 할것 같아 제품에다 꼭 껴안으며 도리질을 했다.

어머니가 눈물을 머금고 말했다.

《그러나 어쩌겠니. 우리 집 사정이 당장 떼죽음이 날 판인데… 생각다못해 널 함께 보내기로 했다. 네가 같이 가면 봉순이도 돌봐주고 또 너한테도 공부를 시켜주겠다는구나. 한해에 둬번씩 집에도 보내주구.》

어디에 있는 어느 곡마단이라는것은 후에 다 알게 된다면서 그저 이 산골에서는 구경하기도 힘든 희한한 도회지라고만 말했다고 했다.

봄비가 한여름의 장마비처럼 출출 내리는 날 아침 봉빈이는 어린 봉순이와 함께 삐그덕거리는 낡은 마차에 올라앉아 눈물을 흘리며 몇십리 멀고먼 정거장을 향해 고향마을을 떠났다.

그날 어머니와 영영 헤여져 파란곡절의 길에 나서게 되는 길일줄을 그는 생각지도 못했었다…

눈속의 길은 아름드리참나무 한그루가 무성한 등성이길과 이어졌다.

등마루에서는 세갈래의 오솔길이 갈라져나갔다.

참나무밑에는 주먹만큼씩한 돌들이 쌓여 무둑하게 무지를 이루었다. 돌무지우로 무겁게 늘어진 참나무가지마다 빨갛기도 하고 희기도 하고 파랗기도 한 갖가지 천오리들과 종이오리들이 매달려있었다. 이 등마루로 오르고내리는 사람들이 고달픈 인생사연들을 남모르게 하소했을 모습이 눈앞에 어리여 가슴이 저려났다. 이것이 어렸을 때 흔히 보군 하던 내 나라, 내 땅의 그것이구나 하는 생각에 영무도 목이 메이고 눈굽이 쩌릿했다.

그가 고모와 함께 살던 덩두골의 덕대봉마루 고개길에도 이런 참나무가 있었고 돌무지가 있었다. 드문드문 고모와 함께 그 고개길을 넘을 때면 어린 영무도 고모를 따라 길가에 딩구는 제 주먹만한 돌을 주어들고가다가 그 돌무지에 던지군 했다. 고모가 그렇게 하라고 시키군 했던것이다. 왜 그래야 하는가고 물었을 때 고모는 그래야 앓지도 않고 앞으로 커서 잘살게 된다고 했다. 진짜 그렇게 믿기야 했으랴만 앓지 말고 건강해서 부디 잘살기를 바라는 고모의 마음이였으리라 생각하니 영무는 코언저리가 찡했다. 지주집 머슴으로 끌려간 고모가 지금 살아계시기나 할가?

저 앞쪽 갈림길목에서 봉빈이가 뜻많은 눈길로 영무를 바라보고있었다. 영무는 깊이 새겨두기라도 하련듯 참나무가지들을 찬찬히 살펴보고나서 성큼성큼 봉빈이한테로 걸어갔다. 거쿨진 몸이 더 진중하고 무게있어보인다.

봉빈이는 말없이 영무의 얼굴을 여겨본다. 그 눈길에 정이 끓고 념려의 빛이 물결쳤다.

영무도 말없이 봉빈이를 마주보았다. 그 눈길에도 역시 이름할수 없는 정이 끓고 기원의 뜻이 번쩍이였다.

그들은 서로 얼굴을 돌리며 련련히 뻗어내린 산발너머로 아득히 사라져간 산길을 바라보았다. 각자 이제 헤여져가야 할 공작의 길이였다.

봉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

《몸 조심하시오. 제발 흥분하지 말구!》

《알겠소. 동무도 조심하오. 련대장동지도 말했지만 이전 동지들이 돌아오지 못했다는걸 보면 여기 형편이 심상치 않은것 같소.》

《걱정마오. 남의 땅에서도 죽지 않았는데 아무러면 제 나라땅에서 잘못되겠소?》

《하긴 그래. 하지만 개놈들이 마지막발악을 한다는걸 명심하오. 원래가 미친 놈들이 아니요.》

《글쎄 걱정말라니까. 내 동무가 돌아오길 기다리겠소. 돌아가는 길에 꼭 들렸다가야 하오.》

《그야 련대장동지의 명령이 아니요.》

《명령이 아니면 그냥 갈텐가?》

《원 무슨 말을!》

《하하하.》

《하하하…》

그들은 손을 맞잡으며 크게 웃었다.

한참 그렇게 웃고나서 진중히 두손을 힘있게 쥐여흔들었다.

더이상 말을 안했다.

말없이 또 한번 마주쥔 손들을 힘있게 잡아흔들고는 씩씩하게 눈길을 헤치며 헤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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