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5(2016)년 3월 1일
장편소설 《고요한 격전》
제 7 장

2

리순철은 부서지기라도 하듯이 문이 왈칵 열리는 바람에 깜짝 놀라며 몸을 반쯤 일으켰다.

흥분된 차창일이 얼굴부터 쑥 들이밀었다.

《형님, 빨리 일어나슈, 빨리. 원 그쯤하구 이젠 일어날게지 맨날 누워만 있소? 빨리 준비해야겠수다.》

차창일은 문앞에 떡 벋치고서서 량허리에 손을 얹으며 방안을 둘러보았다.

어수선하기 그지없는 밤이였다.

제사 혀를 끌끌 찬 차창일은 다짜고짜 순철이 덮고있던 이불을 와락와락 걷어 방구석에 밀어놓았다.

《아, 빨리 서두르란데요.》

리순철은 여전히 어정쩡하여 한마디 물었다.

《왜 이러나?… 무슨 일인가?》

《자, 이런… 형님이 근거지로 들어가게 됐어요. 긴급지시가 내려왔단 말예요. 다른 사람들은 이미 다 떠났는데 형님은 몸이 편찮아해서 좀 늦었어요.》

순철은 두눈이 화등잔처럼 되였다. 이어 그는 벌떡 일어났다.

《그게 정말인가?》

그러던 그는 스르르 다시 주저앉았다. 설레설레 손을 저었다.

《원 무슨 소린지… 근거지에서 나같은걸 뭘하려 데려가겠나. 이젠 페인이나 같은데. 어휴… 여보!》

또 가슴을 치고 방바닥을 두드렸다.

말없이 지켜보기만 하던 차창일은 성을 벌컥 냈다.

《아 이런… 근거지에서도 다 생각이 있어 부르는게 아니겠소. 놈들이 언제 또 붙잡아들일지 아우? 이제 잡혀가면 끝장이 될수도 있잖소. 시간이 없어요, 시간이. 지금 련락원이 저 뒤산에까지 내려와 기다려요. 철석형님도 거기 가있구. 형님 한사람때문에 특별히 다시 또 내려왔어요.》

차창일은 무작정 순철이를 잡아일으켰다.

《이 사람 좀 덤비지 말게. 글쎄 난 못가. 임자랑 철석형님이랑 다같이 간다면 몰라두.》

차창일의 눈빛이 반짝했다. 그는 얼른 주위를 둘러보고나서 순철이앞에 다가앉았다.

《옳수다. 형님, 그러찮아두 내 부탁하려던 참인데 청 좀 들어주겠소?》

순철은 눈만 치떴다.

차창일은 또한번 밖의 동정까지 살피고나서 소곤거렸다.

《철석형님한테 말좀 해주. 몸도 추서지 못해서 그러니 꼭 나와 같이 가겠다구요. 혼자선 절대 못가겠다구요, 예?》

순철은 웃몸을 약간 젖혔다. 그러면서 반신반의의 어조로 물었다.

《될가?… 나야 물론 좋지만.》

《아, 맥이 없어서 걷지 못하겠다구 딱 잡아 뻗치란 말이요, 형님. 내 일생 잊지 않겠어요.》

《그럼 그래 보지.》

순철은 그제서야 마음이 동하는지 제먼저 일어났다.

《한데 뭘 좀 가지고 떠나야지 않겠나?》

차창일은 속불이 더 활활 타는듯 어성을 높였다.

《가지구 가긴 뭘 가지구 가요. 다 망한 집안에 뭘 있겠다구. 이젠 농사군근성을 좀 버리라요. 자, 빨리 가자요, 빨리. 천재일우의 기회란 이런 땔 두고 하는 말이예요. 오늘 놓치면 일생 후회할거요, 철석형님처럼. 자, 빨리요.》

그는 순철의 손목을 잡아끌며 뒤문으로 빠졌다.

누구도 보지 않게 뒤산 숲속에 들어서서야 잠시 숨을 돌리였다.

얼마쯤 숨을 헐썩이며 따라오던 순철이 불현듯 차창일의 팔을 잡았다.

《이사람, 아무리 바빠두… 저기 좀 들렸다 가세나.》

순철이 턱으로 가리키는 산릉선에는 얼마전에 묻은 안해의 묘가 있었다.

입술을 짓무는 순철의 두눈굽에는 어느새 물기가 슴뱄다.

어쩔가 망설이듯 잠시 사이를 두었던 차창일이 손을 홱 내리그었다.

《좋수다.》

그는 제사 앞장에 서서 가둑나무숲을 와락와락 헤쳤다.

힘겹게 따라오는것 같던 순철이 정작 묘앞에 이르자 차창일을 왈칵 앞서나가며 곡성을 터뜨렸다.

상돌앞에 이르기도 전에 손바닥으로 땅을 치며 엉금엉금 기다싶이 했다.

《여보, 날 함께 데려가 주. 제 손으로 명을 끊을 땐 무슨 결단이 있어 그랬겠는데 어째 아직 내 속만 까맣게 태우오. 내 언제 한번 욕을 했소, 싫다는 소릴 했소. 동서팔방 날 따라다니며 고생만 죽게 하다가 여기 혼자만 누웠으니 이 못난인 어찌하면 좋소.…》

순철이 그리 크지도 않은 상돌을 붙안고 몸부림을 쳤다. 그대로 두면 끝이 안날것은 물론 억장이 무너져 숨이 넘어갈듯싶었다.

저도 슬픔이 솟구친듯 눈굽을 꾹꾹 찍으면서도 시간이 급해 차창일은 억지로 순철을 잡아일으켰다. 약속된 장소에는 차창일의 말대로 장철석이 먼저 와서 련락원과 함께 기다리고있었다.

련락원은 키가 좀 작달막한데 참나무다듬방망이처럼 단단해보였다. 평범한 농군차림에 잔등에는 그리 크지 않은 배낭 하나를 지고있었다.

무척 급해하는 표정이였다.

장철석도 일체 다른말없이 긴장한 표정으로 련락원에게 고개만 끄덕여보이며 말했다.

《어서 떠나오. 다시 말하는데 정말 조심해가오.》

차창일이 순철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순철이 그의 부탁대로 간절히 말했지만 장철석은 두말 다시 못하게 싹 잘라버렸다.

《이게 뭐 누구 혼자 결심할 일이요? 어제오늘 조직에 든 사람같구만!》

차창일이 제가 직접 무릎을 꿇고 빌다싶이 했지만 마이동풍이였다.

《이거 왜들 자꾸 이러오. 철부지애들이요?… 련락원동무, 어서 떠나오.》

며칠전에 내린 비로 하여 발밑에서는 물이 질적거렸다. 해를 두고 자라다가는 스러지고 스러진 우에서 또 자라고 하여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이끼밭은 물판을 걷는것 같았다.

머리우에는 하늘이 보이지 않게 무성한 나무가지들, 앞을 꽉 막아선 나무바다… 이끼밭을 지나면 산딸기, 노루발족풀, 새초 그리고 또 이름도 모를 풀들이 키를 넘게 자란 숲이 나지고 그 숲을 헤치면 아득히 뻗어오른 산릉선…

가도가도 끝이 안나는 대원시림을 꼬박 이틀이나 걸었다.

순철은 정말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었다.

허기가 져서 참기 힘들었다.

이럴줄 알았더라면 어떻게든 먹을것만이라도 좀 마련해가지고 떠났으련만 미처 정신차릴 사이없이 들볶아대던 차창일의 독촉에 그럴 생각도 전혀 못했었다.

하긴 그의 심정도 리해됐다. 천재일우의 기회라고 하던 그가 아닌가.

가마안에 저녁까지 먹고도 남을만큼 묵여두었던 밥이 생각나면서 배안에서 꼬르륵 소리를 연방 울렸다.

태고의 밀림속에서 련락원이 배낭속에 넣어가지고왔던 강낭떡과 미시가루, 닦은 콩으로 끼니를 에우군 하다보니 이제는 그것도 판이 나는가싶었다.

련락원도 먼길 떠나는 사람이 도중식사준비야 안해가지고 떠나랴 하고 생각하면서 별로 푼푼히 넣어가지고 오지 못했다는것이였다.

원 사람두, 그렇게 볶아댈건 뭐람.

하긴 근거지로 들어갈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라던 차창일이 그 성미에 그쯤은 볶아댈수 있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쨌든 이렇게 사흘길이나 걸어도 끝이 안날줄이야 어이 알았으랴.

순철은 종시 이끼옷을 시퍼렇게 입은 분비나무둘레에 손을 얹고 서서 숨을 헐썩이였다.

하늘을 보려고 고개를 드니 역시 온통 나무가지천지인데 그 틈사이로 손바닥만큼 올려다보이는 하늘이 바람에 날리는 연꼬리처럼 흔들흔들 흔들렸다.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하늘과 땅이 빙그르르 돌아 꺼꾸로 서는것 같았다.

순철은 넘어지지 않으려고 이발을 앙다물며 아름이 넘는 분비나무를 그러안았다. 그래도 난파우의 배를 탄것처럼 나무통까지 흔들려서 종시 맥없이 주저앉고말았다.

《왜 그러오? 어디 말째오?》

저만큼 앞서나갔던 련락원이 뛰여와 순철이를 부둥켜안았다.

순철이는 말을 못하고 손만 내저었다.

하얗게 피기가 가셔진 얼굴에 기름같은 진땀이 내뱄다.

련락원은 얼른 배낭을 풀고 군용물통을 꺼냈다.

《마시오. 이런 땐 이 물이 꿀맛 못지 않소.》

어디서 담았던 샘물인지 진짜 정신이 쩡 들었다. 샘물터만 만나면 아무리 높은 벼랑턱이라도 기어코 올라가 받아넣군 하는 련락원이였다.

이런 산길에는 경험이 무척 많은가 보았다. 나이는 순철이보다 별로 많아보이지 않는 청년… 얼마나 기운이 좋고 팔팔한지 몰랐다. 하기사 이런 대밀림의 산판에서 단련된 사람이 아닌가.

그는 좀해서는 입을 열지 않았다.

하루밤 자야겠수다… 하는게 고작이였다.

사방 둘러보아야 련련히 뻗어나간 산발밖에 보이지 않는 어느 한 산마루에서 또 밤을 새우고났을 때 순철이 이제 얼마쯤 더 가야 하느냐고 물었다. 한다는 대답이 《김일성장군님의 유격대원들 말이요, 10년이상을 내내 걸어다니며 싸운다질 않소, 저 동북땅산판에서 말이요. 우리야 그래두 제 나라, 제 땅에서 다니질 않소.》하는것이였다.

꼬치꼬치 캐여묻지 말라는 뜻이였다.

순철이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러는 순철이한테 미안했던지 련락원은 다시 길을 떠났을 때에는 청하지도 않았는데 처음으로 자기의 경력을 이야기했다.

그의 고향은 곽산쪽의 어느 한 산골마을이였다고 했다. 산이 너무 깊어서 순사놈들도 선뜻 발을 들여놓기 저어하는 곳이였다는것이다.

하루는 무슨 검열을 한다면서 두놈의 순사가 들이닥쳤다. 허청간이며 창고며 뒤간까지 집집마다 쑤시고다녔다. 말이 검열이지 누구인가를 찾는게 분명했다.

점심참이라 아버지와 함께 조밭김을 매고 점심밥을 먹으려 집으로 내려오던 그는 울바자길앞에서 굳어졌다. 혼자 집에 있던 어머니가 놈들의 수색에 잘 응하지 않았던지 한놈이 어머니의 귀뺨을 사정없이 때리고있었던것이다.

《개놈의 새끼!》

그는 손에 들었던 호미를 내동댕이치면서 바람처럼 날아들었다. 한놈은 배허벅을 발길로 걷어차고 어머니의 뺨을 치던 놈은 이마로 들이받았다.

불의의 타격을 받은 두놈은 마당에 나딩굴었다.

그래도 성이 풀리지 않은 그는 어머니의 뺨을 치던 놈을 어깨에 힝 둘러메고 온 마을사람들이 보란듯이 집앞으로 백메터쯤 걸어나가다가 좔좔 소리치며 흐르는 도랑창에 꽉 처박아넣었다.

그다음 두자루의 장총과 칼까지 걷어가지고 산속으로 들어갔다.

당장은 숨어서 어머니, 아버지가 날라다주는 밥을 먹으며 몇달을 지냈다.

그러다 징병, 징용을 기피해서 산속으로 들어오는 청년들과 만났다.

아직 무슨 조직이나 단체 같은것을 무을 생각까지는 못했다.

어쨌든 운명의 공통성으로 하여 마음이 합쳐진 그들은 사생결단하고 살기 위한 투쟁을 벌렸다.

정주, 구성, 삭주, 선천일대를 돌아가면서 길목을 지키다가 일본놈만 만나면 가차없이 족쳐댔다.

일본놈만 치는 《평안도 림꺽정패》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쫙 돌았다.

선천의 약수골이란데서는 일본군 한개 중대가 몰려들어 수색을 벌리는 소동까지 일어났다.

그러다 어찌어찌하여 김일성장군님의 유격대와 련결된 국내혁명조직과 선이 닿아 이곳 비밀근거지로 들어왔다는것이였다.…

《자, 이것도 좀 마시오.》

련락원은 얼마 남지 않은 미시가루를 꺼내서 사기공기에 정성스레 타주었다.

《아 이거, 거기서두 별로 자신게 없는데…》

순철이 미안해서 사양을 했다.

련락원은 그냥 권했다.

《듣자니 부인의 일때문에 속병을 앓았다는데… 어서 기운을 내시우. 이런 때 쓰러지면 영영 못일어나오.》

순철은 말을 못하고 미시가루물을 꿀꺽꿀꺽 마셨다. 그리고나서 제사 결연히 일어섰다.

《고맙소. 다시 갑시다.》

행군이 계속되였다.

골짜기를 건너서면 또다시 골…

또 하루의 해도 뉘엿뉘엿 기울어갔다.

어디까지 왔는지 앞이 훤히 트이면서 장마당이나 학교운동장만큼씩한 공지들이 나타났다.

공지들을 몇개 건너가자 또 끔찍한 밀림이 나타났다.

련락원이 문득 멈춰서서 주위를 두릿두릿 살폈다.

그는 다 썩어가는 진대나무밑으로 가더니 홍두깨처럼 굵은 나무토막 하나를 찾아냈다.

그 나무토막으로 가까이에 있는 이깔나무밑둥을 몇번 쳤다.

어디선가 같은 방법으로 나무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무인지경의 수림속에서 누구인가를 부르는 목소리가 터졌다.

나무들사이로 농사군차림의 중년사나이가 달려왔다.

《련락원동무!》

《박동무!》

두사람은 서로 붙안고 반가와했다.

《무사했구만. 거기 동무들은 다 잘 있소?》

《잘 있지 않구, 모두 박동무네를 보고싶어하오. 이제 해방이 되면 신세갚음을 단단히 하겠다고들 하지.》

《원 신세갚음은 또 뭘.》

둘은 서로 어깨를 치며 유쾌하게 웃었다.

한참 그렇게 웃고나서야 련락원은 순철을 가리켰다.

《자, 인사를 하우, 리순철동무요.》

《반갑습니다. 박준보라고 합니다.》

박준보는 리순철의 두손을 꽉 잡았다. 진짜 농사군처럼 크고 두툼한 손에 장알이 졌는데 어찌나 힘이 센지 집게로 꽉 집는것 같았다.

《지휘부에서 보내는 련락을 받고 기다렸습니다. 아, 일손이 얼마나 딸리는지.》

련락원은 그자리에서 돌아섰다.

오늘중으로 지휘부에 가닿아야 한다는것이였다.

쉬지도 않고 어떻게 그렇게 떠나겠느냐고 순철이 걱정하자 련락원은 히쭉 웃으면서 네댓시간 더 걸으면 된다고 했다.

네댓시간?!… 그렇다면 아직 70리정도는 더 가야 한다는 말이 아닌가.

하다면 여기는 어딘가?

순철은 그때부터는 박준보의 안내를 받았다.

박준보는 련락원과는 달랐다.

순철이 힘들어한다고 팔을 꼭 붙잡고 걷는데 쉴새없이 많은것을 알려주었다.

자기네는 후방보장성원들인데 비밀근거지에서 떨어져나와 농사를 짓는다는것, 근거지사람들도 먹어야 살겠는데 매양 지하조직의 방조만이야 어떻게 받겠는가, 그래서 곳곳에 농사조를 무어 내보냈는데 이 아근에만도 여러 군데에 벌려져있다고 했다.

《듣자니 순철동무도 농사군이였다지요? 농사군이 제일이지요. 내 그래서 나부터 보내주시오 하고 탄원을 했수다. 아 제 손으로 씨를 뿌리고 김을 매구 걷어들이는 기쁨이란 도회지사람들은 몰라. 그 천하지대본의 진맛을 알탁이 있나.… 이제 보우, 대풍이 들었수다. 강냉이이삭이 팔뚝같구요, 벌써 조이삭이 개꼬리처럼 늘어졌수다. 오이, 가지, 부루… 없는게 없지요. 그저 손이 모자라서 그랬는데 우리 지휘부에서 실농군을 보내주었는가부다.》

세사람이서 닷새갈이가 썩 넘는 땅을 일구고 농사를 짓는데 정말 일손이 모자란다고 거듭 반복했다.

순철은 얼굴을 붉히며 한마디 했다.

《이거 기대에 보답하겠는지 모르겠습니다.》

《무슨 말을… 우리도 다 들었수다. 광산일을 하면서두 터밭농사를 그렇게 잘 지었다면서요?》

순철은 놀랐다.

그는 좀 서운해서 물었다.

《그렇게 농사일만 하다가 총쏘는건 언제 배우고 싸움은 언제 하겠소?》

박준보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겨울에 실컷 하지요. 9월달, 늦어서 10월달까지면 싹 다 거두어가지고 철수하거던요. 이젠 몇달 남지두 않았수다.》

진짜배기 텁텁한 농사군이였다. 순철은 사방을 둘러보며 제 소감을 허물없이 말했다.

《난 광산에서 살면서도 이렇게 깊고 험한 산판이 있으리라고는 생각 못했수다. 가도가도 끝이 안나는 산판이예요. 이젠 돌아가라구 해두 도저히 돌아갈것 같질 못해요.》

《옳수다.》

박준보는 구대원이연 했다.

《그러니 항상 방위판정을 잘해야 해요. 그리구 방위목표를 똑똑히 기억해두구. 그렇지 않다간 영낙없이 산판귀신이 돼요.》

순철은 가슴에 서늘한 기운을 느꼈다.

박준보는 한껏 자라 제절로 쓰러진 강대나무를 훌쩍 타고넘으며 말했다.

《올봄에 말이요, 이 아근에서두 겨울난 시체를 두구나 발견했수다. 일본놈 밀정들이였지요.》

《밀정이요?》

순철은 소스라치듯 물었다.

《이 산판에두 밀정이 들어왔어요?》

박준보는 침을 찍 내쏘고나서 말했다.

《산판이니까 더 기여들지요.》

《그렇긴 하겠지요. 한데 그게 밀정놈들이였다는걸 어떻게 알아요? 사냥군들일수도 있잖아요.》

박준보는 또 침을 퉤 내뱉았다. 기분이 나쁘면 그러는 버릇인 모양이였다.

《시뻘건 줄로 가운데 열십자를 그은 증명서들이 나왔거든요.》

순철은 떨어질세라 박준보의 뒤를 바싹 따라걸었다.

한참 걸어나가니 진짜 혀를 찰만큼 작황이 좋은 강냉이밭이 나졌다.

조밭도 보이고 남새밭도 보였다.

강냉이밭속에서 와실렁와실렁하는 소리가 나더니 온통 땀벌창이 된 두사람이 역시 반가운 소리를 치며 달려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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