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5(2016)년 3월 1일
장편소설 《고요한 격전》
제 1 장

6

꿈속에서보다 깨여난 후의 잔몽이 더 어수선하는 법이다.

장철석은 지나간 한달어간이 통털어 악몽과도 같았다. 도저히 현실로는 믿어지지 않을 일들이 연줄연줄 꼬리를 물었으니 어느것이 현실이고 어느것이 꿈이였던지 선명칠 않았다.

부산까지 끌려갔다가 사생결단을 하고 뛰쳐나온 사람과 정작 헤여지자고 하니 또 가슴이 미여지는것 같았다.

이제 다시 만나게 될가?

저도 같이 린산이라는데까지 따라가서 아주머니도 만나보면서 다문 며칠이라도 더 있다가 헤여질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서운하고 미안한 생각에 다시금 진심으로 약속했다.

《내 꼭 상풍광산부터 찾아가보겠소. 박상이라고 했지?… 만약 거길 뜬다고 해도 내 꼭 그 광산에서 행처를 알리겠소.》

순철은 눈물을 글썽 머금었다.

《고마와요. 내 성의를 그렇게 받아주니… 사실 내가 형님을 위해 할게 그것밖에 더 있어요.》

《또 그 소리… 내 먼저 가 자릴 잡을테니 여차하면 따라오라구. 내 자릴 떠두 임자네 오기 전엔 안떠.》

그건 좀 지나친 약속이라는 생각에 더 다른 말을 안했다.

철석은 제먼저 돌아섰다.

정작 헤여지고나니 점점 더 순철이와 함께 부산시가공원에서 밤중에 왜놈보초를 칼로 찔러눕히고 도망을 치던 일부터가 현실로 믿어지질 않았다. 그처럼 걱정하던 안해를 만나기도 전에 또 붙잡히지는 않을가?

철석은 다시 네댓새동안 산발을 톺아서야 구창광산에 이르렀다. 해가 퍽 기울어진 저녁무렵이였다. 마침 마른 삭정이를 주으려 산탁에 올라온 마을아이를 만났다. 그 아이를 통해 《형제계》성원 한명을 그들만이 아는 페갱으로 불러내는데 성공했다.

마을소년의 련락을 받고 《형제계》성원이 달려온것은 두시간 가까이 기다렸을 때였다.

눈물이 글썽해서 철석이와 마주앉은 그의 말은 이미 예견했던 그대로였다.

《밀정이 있은것 같아요. 글쎄 매 갱안의 우리 〈형제계〉성원들만 쌀함박에서 뉘 집어내듯이 말짱 골라서 징병, 징용으로 끌어가지 않았겠소. 집식구들도 모르게 감쪽같이 말이예요.》

한달전에 《형제계》에 든 예닐곱명의 성원들은 다행히 밀정의 눈에 뜨이지 않았는지 무사하다고 했다.

《거 남갱의 말더듬이 있잖나요. 그놈이 밀정인것 같다는 말이 있어요. 형님네랑 끌려간 다음 인차 없어졌어요. 사람들 말이 사실 그놈은 말더듬이가 아니였대요. 어떤 땐 아주 청산류수같이 말하더라는거예요.》

장철석은 한참이나 눈을 감고있었다.

캄캄한 밤 홰불방망이들을 휘두르며 싸우던 일이 눈앞에 선했다.

《쳐라!》

《때려엎어라!》

《우리 〈친목회〉의 본때를 보이자!》

유난히 챙챙하던 목소리.

장철석은 분명 향방없이 펄펄 뛰는 《친목회》성원들 뒤에서 미친듯이 웨쳐대는 그 말더듬이의 악청을 알아들었었다. 전혀 더듬는데가 없는 쨍쨍한 목소리였다.

말이 막혀 안타까와하는듯 하던 그놈의 낯짝과 함께 돌연히 음충스럽고 험상궂은 이찌가와 노리아끼의 얼굴이 떠올랐다. 가슴이 철렁했다.

비로소 그는 일본의 중국동북강점때부터 제놈들의 령사관에 붙어 특수정보활동에도 적지 않게 관여했다던 노리아끼라는데 생각이 미쳤다.

하다면 그 늙다리의 모략?!…

내 왜 그에 각성하지 못했던가 하는 후회가 가슴을 썰었다. 그의 아픈 가슴을 위로하듯 《형제계》성원의 말이 계속됐다.

《〈친목회〉사람들도 이젠 정신을 바로 차렸어요. 말더듬이가 왜놈들의 끄나불이였다는걸 알았거던요. 얼마나 미안해하는지 몰라요. 다 화해하구 우리 계와 합쳤어요. 형님얘길 많이 했어요.》

그 소식은 기뻤지만 혜영이네 집 소식은 장철석을 더욱 아연케 했다.

《형님이 행방불명이 된지 대엿새째되는 날 갑자기 경찰주재소에서 자동차를 가지고 달려들었수다. 혜영이를 비롯해서 열댓명 처녀들을 마구다지로 끌어다 차에 실었는데… 무슨 군수공장이란데로 데려간다는거지요. 일본으로 갔다는 말도 있구, 〈위안부〉로 배를 태워 남양군도로 끌어갔다는 말두 돌아 며칠동안 온 마을이 울음판이였지요. 에―쌍, 개놈의 새끼들!》

철석은 어떻게 그와 헤여졌는지 몰랐다.

일본놈들은 꼭 망하게 되니 조직의 초지를 절대로 잊지 않게 해달라는 당부와 함께 혜영이네 식구를 잘 돌봐달라는 부탁만을 남겼을뿐이였다.

《우리 해방된 날 꼭 다시 만납시다. 량심에 가책될 일없이 떳떳하게 말이요!》

그렇게 떠난 길이 또 네댓새 걸렸다.

그 네댓새의 길은 한달어간의 고행보다 더 힘들게 느껴졌다.

특히 더 가슴을 옥죄이며 찢듯이 아픈것은 혜영이의 운명이였다.

《위안부》, 남양군도란 말이 귀전을 칠 때마다 온몸의 피가 얼음덩이처럼 꽛꽛이 얼어붙는것 같았다. 어디든지 달려들어 닥치는대로 박산을 내고 뒤집어놓고싶었다.

이놈들, 짐승같은 놈들이 무슨짓을 벌렸단 말인가!

혜영! 도대체 살아있기나 할가?…

랑림산줄기는 태백산줄기보다 더 험하고 무성하고 깊어보였다. 과연 이 산속에서도 사람이 살긴 할가 하는 생각이 들군 했다. 호랑이도 향방을 잃고 겁이 나서 따웅따웅한다는 천고의 산지이고보면 가슴떨리는 전설인들 한둘뿐이랴!…

상풍광산은 인간세상과는 천리담을 쌓은듯한, 구름마저도 산굽에 내려감기군 하는 장엄하고도 숭엄하고 무엇인가 두려움도 자아내게 하는 무인지경의 대산림지대에 마치도 하나의 종처자국처럼 움푹 패이게 자리잡고있었다.

산은 험해도 강계와 원산, 함흥, 평양을 지나 남포방향으로 나가는 길들이 나졌고 비록 협궤이긴 해도 기차길이 놓이였다. 전기가 들어와 선광장의 와르릉거리는 동음이 앞산뒤산 봉우리마다 메아리쳐 지심깊이 파고든 그 어떤 괴물의 신음소리같은 괴상한 소리가 즈르릉즈르릉 울렸다.

광산입구에서 1키로메터쯤 내려오면 꽤 널직한 골안이 나지는데 어느 군급 도회지 못지 않을 번창한 시가지가 들어앉았다. 그 시가지를 중심으로 동서남 세 방향으로 또 골안이 패였다. 그 골안들을 따라서도 제나름의 인가들이 줄줄이 늘어서서 끝을 헤가릴수 없었다.

2층, 3층 벽돌집도 두간두간 보이는 시가지에는 상점, 전당포, 려인숙, 식당, 사진관, 경찰서, 면사무소, 우체국 등 인간세상에서 볼수 있는것은 다 있었다. 산지가 하 높고 깊다보니 칼소리 절그럭거리는 경관들과 헌병, 수비대, 게다짝을 딸가닥거리는 흉한 옷차림의 왜년들만 없다면 진짜 하늘나라에 들어선게 아니랴싶을만큼 눈에 익으면서도 각별히 이채로운감을 안겨주었을것이다. 시가지는 물론 도로들에 이르기까지 구창광산에 비하면 그 규모부터가 엄청나게 커보였다.

광산마을어구에 들어선 장철석은 문득 이 깊은 산지에서 어떻게 광맥을 찾아냈을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구창광산의 유래가 생각나서였다.

구창광산은 30여년전까지만 해도 그 지대에 금이 묻혀있는줄은 누구도 몰랐다고 한다. 골안마다 드문드문 살길을 찾아 숨어든 류랑민들이 초막같은 집들을 짓고 화전을 일구며 살았는데 한번은 금전판에 나다니며 하루하루 연명하던 젊은이가 어느 친척을 찾아왔다고 했다. 별로 할 일도 없는 젊은이라 기껏 늦잠을 자고 일어나 집앞에 흐르는 구창강에 나가 세면을 하댔는데 뜻밖에도 물속에서 번쩍거리는 누런 덩어리 하나를 발견했다.

이게 뭐야! 하고 성큼 뛰여들어가 파내보니 큰 메주덩이만한 자연금덩이였다.

젊은이는 누가 볼세라 토목수건에 그 금덩이를 싸서 감추고는 그날로 친척집을 떠났다. 일약 횡재를 한 젊은이는 이곳저곳 놀음판을 찾아다니면서 돈을 물쓰듯 했는데 그만에야 경찰의 주목을 끌게 되였다. 어디서 돈을 훔쳤느냐고 짓조겨대니 곧이곧대로 토설을 하고말았다. 그 사실은 곧 조선총독부로, 총독부를 거쳐 일본본토에 알려졌다. 가뜩이나 굶주린 승냥이처럼 기름진 조선땅에 코를 벌름거리던 《동척》이 하루아침에 들이덮쳤었다.…

구창광산이 그렇게 되여 일본놈의 손에 들어갔다면 상풍광산은 어떻게 이렇게 거창해졌을가?

물론 이곳도 《동척》산하일테지 하고 생각하며 스적스적 시가지길을 걷던 장철석은 이상한 눈길로 저를 살펴보는 중년의 한 사나이와 마주쳤다.

늘씬한 키에 힘꼴이나 쓸만한 체격인데 물이 다 날은 밤색캡을 쓰고 손에는 무명보자기에 싼 둥실한 밥곽을 들었다. 역시 색이 다 날고 실밥이 툭툭 터지기 시작한 일본산로동화가 돌가루물에 허옇게 젖은걸 보면 하루일을 마치고 갱에서 나오는 광부가 분명했다.

꾹 다물린 입과 순해보이면서도 어글어글한 눈이 어딘가모르게 믿음이 가게 했다.

가까이에 오가는 사람이 없어서 철석은 스스럼없이 그앞에 다가섰다.

《말 좀 물읍시다. 혹시 박상이라고 모릅니까?》

사나이의 눈길이 대뜸 꼿꼿해졌다.

그는 급히 주위부터 살펴보았다.

이어 바싹 더 긴장한 눈길로 철석을 깐깐히 뜯어보고나서 되물었다.

《길손은 어디서 오시오?》

철석은 여기서도 무슨 일이 생긴게 아닌가? 하고 같이 긴장됐지만 태연스럽게 사실대로 말했다.

《실은 그 사람 친구의 소개를 받고 일자리를 하나 얻어볼가 해서 찾아오는 길입니다.》

《친구요? 그 친구가 누굽니까?》

철석은 주저하다가 순철의 이름을 솔직하게 댔다.

《순철이요?… 리순철이라…》

사나이는 두세번 곱씹었다. 아무리 해도 생각이 안나는지 고개를 기울기울하고나서 또 뚫어져라고 철석을 뜯어살폈다. 이어 퉁명스레 한마디 했다.

《하여튼 날 따라오우.》

시가지복판을 꿰질러나간 꽤 넓은 길을 한참 걸어내려갔다. 이따금 마주치군 하는 사람들이 인사를 했지만 사나이는 별로 반가이 받지도 않았다.

철석을 소개하는 일같은것은 아예 생각지도 않는듯싶었다.

어느 려인숙이나 숙박소같은데를 알선해주려는가부다 했는데 경찰서와 수비대병영이 빤히 마주보이는 어느 한 개인집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장철석을 마당에 세워둔채 집주인과 몇마디 수군거리고나서 여전히 툭한 소리로 《오늘밤은 이집에서 묵소. 별로 갈데도 없는가본데…》하고는 휭하니 돌아가버렸다.

선녀갱에서 일한다고 하는 집주인은 나이 40이 넘었을가 했는데 침착하고 무척 무던해보였다. 벙어리가 아닐가싶을만큼 전혀 말이 없는 안해와 여라문살안팎의 오누이를 데리고있었다. 저녁밥상을 물리자바람으로 그의 안해는 아무말없이 아들딸을 앞세우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방안에는 장철석과 집주인만이 남았다.

장철석은 자기가 다행스럽게도 이곳 광산의 지하조직선에 면바로 들어왔다는것을 직감했다. 박상이를 찾아왔다고 하니 바싹 긴장한게 분명했다.

검토!

혹시 길가에서 처음 만난 그 사람이 박상이 본인은 아닐가?

이곳 조직이 여간 째이고 세련되지 않았다는 생각에 마음은 오히려 안정되고 기뻤다.

철석은 무한히 솔직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다 털어놓고 빨리 믿음을 받아야 했다. 집주인과 마주앉은 철석은 자기 경력과 함께 지나간 인생사를 될수록 하나도 빠짐없이 다 털어놓으려고 애썼다. 그러다나니 자정이 훨씬 넘었다.

다음날 밤도 그렇게 새우다싶이했다.

이틀밤을 지내고 사흘째 되는 날 저녁에야 길가에서 처음 만났던 그 사나이가 집주인과 함께 나타났다.

《이거 안됐수다. 나와 함께 가기요.》

첫 검토는 통과구나 하는 기쁨에 철석은 서슴없이 따라나섰다.

형형색색의 사택지구를 꿰질러 시가지길을 빠져나온 사나이는 동쪽골안으로 굽어든 돌서덕길에 들어섰다. 아름드리 소나무와 상수리나무가 키돋움을 하듯이 나란히 서있는 산기슭에 동기와를 얹은 나지막한 집 한채가 있었다. 집둘레에는 굵직굵직한 통나무들을 세워 통나무울타리를 쳤는데 철늦은 떡호박줄기들이 얼기설기 뒤엉켜있었다.

몇차례의 서리를 맞아 볼품없이 된 그 떡호박줄기만 아니라면 마당도 반반하고 바람벽에 흙매질도 뽀얗게 새로 해서 퍽 깨끗해보일 집이였다.

기다렸던듯 부엌문이 열리면서 깜장치마에 하얀 당목저고리를 입고 탐스러운 외태머리끝에 자주색갑사댕기를 유난스레 드린 곱살한 처녀가 뛰쳐나왔다.

《오빠, 이제 오셔요?》

무작정 반가와하다가 뒤따라 마당으로 들어서는 철석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사나이는 말없이 들고있던 점심밥곽을 내밀었다.

여전히 인사소개도 없이 무엇이라 눈짓을 했는데 처녀는 알릴듯말듯 고개를 끄덕여보이고는 인차 부엌으로 들어갔다.

철석은 이윽토록 처녀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첫눈에 인정을 끌어당기는 눈매며 작을사하면서도 약간 도툼해보이는 입술, 귀염성스러운 얼굴이 어딘가 낯이 익었던것이다.

어디서 보았을가?

사나이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채 토방에 걸터앉아 로동화를 벗고는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철석이도 따라들어갔다.

방안 역시 별로 값진 물건들은 없었지만 깨끗하게 손질했다. 뒤주를 대신하는 나무궤에는 하얀 종이를 발랐고 그우에 얹은 두채의 이불도 깨끗이 빨아 꾸몄다. 몇군데 꿰창이 났던 곳을 새로 엮은 자리가 헨둥하긴 해도 퍽 오래 깔아온 구름노전 역시 노란물을 들인것처럼 깨끗했다.

사나이가 박달나무를 파서 만든 목침만한 담배함을 들고 철석과 마주앉았다.

철석이 아직 담배를 안배웠다고 사양하자 그는 제 혼자 천천히 엽초를 말며 다시 물었다.

《그래서… 일이 어떻게 됐다구요?》

장철석은 단도직입적인데가 더 마음에 들었다.

틀림없이 이 사람이 이곳 조직의 책임자라는 확신에 보다 더 솔직해야겠다고 마음먹으며 진지하고 성실한 태도를 지었다.

장철석의 이야기를 듣는 사나이의 표정에는 그에 대해서는 이미 다 알고있다는 빛이 력연했다. 장철석의 이야기를 도간도간 끊으면서 요점적인 문제들을 날카롭게 찔러보군 했다.

연방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이야기를 다 듣고난 사나이는 불현듯 사이문을 열며 처녀를 불러들였다.

《인사들 하우. 이앤 영옥이라구 내 동생이요. 내 이름은 한인준이구.》

철석이도 자기 소개를 했다.

분명 어디서 보았던가? 영옥이… 영옥이란 이름도 귀에 익은데… 하는 생각이 더 확고해져서 다시금 처녀의 얼굴을 찬찬히 여겨보았다.

영옥이가 부엌으로 나가자 인준은 퍽 진중하게 말했다.

《일자리는 내가 알선하겠소. 내 로무과장을 좀 주물러놨소.… 하긴 지금 사군데서 징용으로 뽑은 인부들까지 와짝 들이미는판이요. 한데… 다시는 박상이 그 사람을 찾지 마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차차 알게 될거요. 미리 알아둘건 그 사람은 일본경찰에서 눈에 쌍심지를 켜고 찾고있던 사람이 분명하다는거요. 그 사람 찾아온걸 알면 일자리는 고사하고 류치장신세부터 지게 될거요.》

옳다!

순철의 말이 옳았어!

철석은 무릎걸음으로 다가앉았다.

《그래서… 그 사람이 지금 여기 있긴 합니까?》

한인준은 또 뚫어져라고 철석을 마주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사람은 잘못됐소. 두달전에.》

장철석은 한대 맞기라도 한것 같았다.

그는 저도모르게 다그쳐물었다.

《어떻게 말입니까? 어떻게 그렇게 됐습니까?》

한인준은 대답대신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있다가 돌연히 부엌에 대고 소리쳤다.

《얘야, 저녁밥이 다됐냐?》

《예.》

대답소리와 함께 사이문이 열리면서 두사람 겸상으로 차린 밥상이 올라왔다. 흰쌀알이 셀 정도로 섞인 조밥 두그릇에 갓김치, 도라지무침, 버섯볶음이 산골음식의 독특한 맛을 돋구었다.

저녁상을 물리고 났을 때 한인준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일자리걱정은 말구 오늘밤은 우리 집에서 마음 푹 놓구 쉬도록 하우. 내 래일 로무과장을 만나겠소. 그리구 일자리가 잡히면 숙소도 하나 따로 정해야겠소. 믿을만한 집이 한집 있으니 거기에 거처를 정하도록 하우.》

박상이에 대해서는 더 묻지도 말며 대답도 안하겠다는 뜻이 명백했다.

허나 마음은 무등 기뻤다.

비로소 이곳 조직이 저를 신임하며 믿어준다는 신심과 확신에서였다.

하기사 박상이란 사람을 찾아오지 않았는가.

순철이에 대한 고마움이 더욱 북받쳤다. 뭐 날 위한 일이 이 일밖에 없다구!

그는 지금 어떻게 하고있을가? 약속대로 여기로 오지는 않을가?

정성스레 지은 저녁밥을 먹고 오래간만에 따뜻한 온돌방에 이불을 덮고 누웠지만 철석은 오히려 더 정신이 새록새록해서 잠을 잘수가 없었다.

순철이!

박상이!

남정네들때문에 방안에 들어오지 않고 부뚜막에 앉아 밤을 새우는 영옥이를 보려니 또 혜영이 생각이 가슴을 허볐다.

그는 어데로 갔을가?

어데 가서든 죽지만 말아야겠는데…

아! 이 나라 백성들이, 앞날이 구만리같은 이 땅의 끌끌한 청년들이 과연 언제까지 이렇듯 상처투성이 피눈물의 길을 걸어야 하는가!

가슴을 끓이던 그 생각은 다시 부뚜막에 앉아 밤을 새우는 저 처녀를 어디서 만났댔을가 하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Facebook Twitter LinkedIn Google Reddit Pinterest KakaoTalk Na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