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5(2016)년 3월 1일
장편소설 《고요한 격전》

제 2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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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성원을 돌려보내고도 한인준은 얼마간을 더 너설바위에 앉아있었다.

앞산마루에서 스러져가던 잔광은 어느새 재빛어둠속에 녹아버렸다. 시가지쪽으로 점점 커져가던 산그늘과 나무숲속에서 어룽거리던 보라빛황혼은 이미 무거운 어둠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집집의 들쑹날쑹한 형형색색의 굴뚝들에서 맥없이 솟아오른 연기가 그 어둠과 무엇을 하소하기라도 하는듯이 어우러져 이 산 저산 산굽이들을 감돌며 서서히 숲속으로 빨려들어갔다.

한인준은 멀지 않은 저의 집앞으로 강줄기처럼 굽이치면서 흘러가는 연기를 따라 눈길을 더듬었다. 그 연기발이 사라진 소나무숲속에 안해를 안장했다.

한인준이 나이 서른이 넘어 만난 사람이고보면 그리 오래 살지도 못한 안해였다. 몸이 너무 체소하고 병약해서였던지 살림을 편지 4~5년이 넘어서도 잉태를 못해 여간 마음쓰지 않았었다.

하면서도 한인준이 조금이라도 기분상할세라 언제나 웃는 얼굴이였다. 한인준이 광산의 반일지하조직책임자인줄을 알게 된 날부터는 며칠동안이나 잠을 안잤다. 한인준이 먼길을 갔다오거나 비밀모임으로 늦어서 집에 온 날이면 문밖에 나가 온밤을 뜬눈으로 새우기도 했다. 남편한테 무슨 위험이 닥뜨리지 않을가 장밤 문밖에서 보초를 서는 그 연약한 녀인이고보면 심장의 박동인들 오죽 세찼을가!

그렇듯 눈썰미 빠르고 남편을 위하는 마음 하늘에 닿았던 안해가 너무도 뜻밖에 절명을 할줄이야 어이 알았으랴.

한인준은 버섯음식을 좋아했다.

특히 마가을철이면 연한 보라색갓을 쓰고 통통하게 살쪄오르는, 이 고장 사람들이 《보라버섯》이라고 이름지은 그 버섯구이를 무척 좋아했다. 이글이글 피여나는 참나무숯불화로에 적쇠를 올려놓고 소금에 잘 다져진 버섯송이들을 올려놓았다가 노랗게 구워진 다음 한모금의 술과 함께 입안에서 굴리는 맛이란 참!

그런 날 그 남편을 바라보는 안해의 눈빛!

한데 바로 그 버섯때문에 안해가 잘못될줄이야!

한해전의 바로 오늘 그 《보라버섯》을 따러갔던 안해가 열길도 넘는 벼랑밑으로 굴러떨어졌던것이였다.

한인준은 고개를 버쩍 들었다.

《한동무, 내 한동무한테만 조용히 하는 말인데 아주머니가 단순히 부주의로 해서 잘못됐다고만 생각해선 안되겠다는거요. 내 그 벼랑우를 다시 가서 깐깐히 살펴봤소. 뭐 별로 버섯이 많지도 않습디다. 아, 아주머니가 정신이 돌았다구 탐나는 버섯밭들을 옆에 가뜩 두고 굳이 그 위험한 벼랑우에 올라가 버섯을 땄겠는가 말이요.》

안해의 장례를 치른 후 며칠이 지나서 귀띔하던 박상이의 말이였다.

한인준은 온몸의 피가 굳어지는듯 했다.

타살?!

왜?… 무엇때문에??

한인준은 도리를 저었다.

일종의 신경과민이 아닐가 생각했다.

설사 벼랑우에 버섯이 없었다고 해도 안해가 그곳으로 올라갈수 있는 사연이야 한둘이겠는가.

임신도 못하는 병약한 몸이고보면 어떤 약초를 찾아 올라갔었을수도 있지 않는가.

그래서 그 일은 그것으로써 덮어두고말았었는데 지금 다시 칼끝처럼 페부를 찌르며 떠오르는것은 무슨 까닭인가?

정녕 내가 경각성이 없었는가?

박상이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때부터 벌써 내 주위에는, 아니 우리 주위에는 어떤 알지 못할 검은 그림자가 맴돌고있었다는것이 아닌가.

한인준은 산소결핍증환자처럼 가슴이 답답해났다.

뜻밖의 안해의 죽음과 더불어 강동무와 박상이의 가슴아픈 희생이 또 미칠것처럼 정신을 휘―휘둘러놓았다. 이 모든것이 놈들의 그 어떤 마수에 의한것이라면 광산은 왜 아직도 바람한점 없듯이 조용할것인가? 정말 그 모든것이 우연일치일가?

한인준은 종시 결론을 못찾은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마당에 들어서니 안해가 생전에 영옥의 배필로 점찍어놓았던 차창일이 영옥이와 함께 설설 끓는 물에 닭 한마리를 튀다가 닁큼 일어났다.

당상갱에서 일하는 조직성원이였다.

젊은 나이인데 량쪽귀밑으로 구레나룻이 시커먼 저 사람한테 영옥이는 언제 그렇게 정이 들었는지 놀랄 정도였다. 생전에 안해가 점찍어주어서일가?

차창일이 태여난 곳은 동해바다가의 어느 한 어촌마을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그가 아홉살나는 해에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잘못됐다고 했다.

그후부터 어머니가 전복이며 굴, 성게, 문어잡이를 해서 생계를 유지했다고 하였다.

어머니는 바다가마을에서는 보기드물만큼 얼굴이 곱고 몸매도 좋은데다 제주도해녀들처럼 자맥질을 뛰여나게 잘했다는것이다.

그 미모가 종내 일을 당했다. 어느해 여름 성게잡이에 정신팔고있는 어머니를 발견한 왜놈망종녀석들이 네댓놈이나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바다가 젊은녀인의 결사적인 항거에 끝내 수욕을 채우지 못한 망종놈들은 상대적으로 너무 연약한 녀인을 시체로 만들어 바다물속에 던져버렸다.

뒤늦게야 소식을 들은 차창일이 달려갔을 때 외진 벼랑굽이 바다가에는 어머니가 늘 차고다니던 싸리바구니와 피묻은 창칼 하나가 모래불에서 나뒹굴뿐이였다.

그때부터 차창일은 거칠대로 거칠어졌다. 왜놈집이라면 어느 곳에서든 돌팔매질을 했고 왜놈아이라면 무작정 두들겨팼다. 잡히기도 수태 했고 매도 수태 맞았다고 했다. 언제인가는 왼쪽팔이 부러져 한달이상이나 고생을 했다고 하였다.

사방 떠돌아다니다가 나이 스물이 넘어서야 어디든 정착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여기 상풍광산에 류랑의 닻을 내렸다는것이다.

성미가 거칠고 폭발적으로 과격하긴 해도 저처럼 어렵게 자란 사람들한테는 인정이 헤펐다. 마음만 동하면 아끼는것이 없었다.

안해의 고민을 제일먼저 알아준것도 그였다. 그 고민을 풀어주자고 총각의 몸으로 몇십리밖의 의원들을 찾아간적도 한두번이 아니였다.

그 인정에 안해도 그렇고 영옥이도 정이 들었는지 모른다.

《이제 오십니까?》

한인준을 먼저 알아본 차창일이 닭털묻은 손을 바지에 썩썩 문지르며 좀 어줍은 미소를 지었다.

영옥이도 귀뿌리가 발개서 방그레 웃어보이며 손을 털고 일어선다.

《저… 저이가 닭을 사가지고 와서…》

한인준은 헌헌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네, 있는대로 차리지 닭까지 뭘!》

한결 마음이 훈훈해져서 토방에 걸터앉았다.

영옥이와 창일은 다시 이마를 맞대다싶이하고 마주앉아 닭털을 뽑았다.

부엌처마밑에 매달아놓은 등불에 비추인 두 청춘의 얼굴이 부러울만큼 무르익었다.

한인준은 또 한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영옥이가 그만하면 배필을 잘 만난셈이다.

아무렴, 그래야지. 얼마나 기구한 운명의 길을 걸어온 저 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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