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5(2016)년 3월 1일
장편소설 《고요한 격전》
제 2 장

3

세상은 넓고도 좁다는 말이 있다.

장철석이 한인준의 집에 발을 들여놓던 첫 순간 어디서 보았던가고 안타깝게 생각을 굴리면서도 종시 기억해내지 못했던 한영옥은 10년전 북주하양주공장에서 오야마 고로의 실험실살인내막을 밝혀내고 곽영무를 살리는데 결정적역할을 했던 미쯔꼬, 이찌가와 마꼬도가 《황국신민화》정책실현의 표본으로 내세우겠다고 하던 그 하녀였다.

피덩이같은 어린시절부터 류달리 기이한 운명의 길을 걸어오던 영옥이가 한인준을 만난것은 다섯해전, 그의 나이도 열일곱살이 되던 해 겨울이였다.

열두살로부터 열일곱살!

항차 조선말조차 제대로 번지지 못하던 철부지소녀의 고생을 한두마디 말로야 어떻게 다 표현하랴.

남의 집 아이봐주기, 물긷기, 김매기, 빨래질… 그것마저 차례지지 않으면 깨여진 바가지쪼박이나마 주어들고 밥동냥을 했다.

피눈물의 류랑걸식의 길에도 얼굴은 왜 그리 곱게 피는지 심술궂은 사내녀석들의 단련 또한 여북하지 않았다.

때로는 일본말 몇마디로 데설궂은 녀석들이 혼비백산을 하여 줄행랑을 놓게 할수도 있었고 며칠동안 먹을 걱정 안할 돈푼을 손에 쥘수 있는 기회도 생겼지만 죽어도 일본말은 하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나는 조선아이다! 조선사람이다! 조선으로 가야 한다!

조선으로만 가면 따스한 집도 있을것 같고 어머니의 손길과 같은 후더운 인정의 구원도 받을것 같았다.

욕을 먹어도 조선사람한테 먹으면 억울한줄을 몰랐다. 매를 맞아도 조선사람한테 맞는 매는 아픈줄을 몰랐다. 영무, 봉빈이, 관길이, 봉순이… 자기처럼 너무도 일찌기 량부모 다 잃은 고아들이면서도 서로 돕고 서로 위해주며 구김살없이 살아가는 그 인정의 바다에 난생처음 저도 깊이 몸적시기 시작해서였던지 모른다.

그렇게 그들과 마음을 맞추고 기어이 그들을 따르리라 마음을 모질게 다듬어세우니 조선말도 빨리 배웠다.

그는 자기의 이름을 영옥이라고 했다. 양주공장에서 불쌍하게 죽은 영옥이를 대신하고싶은 마음에서였다.

왜놈들이 점점 더 판을 치는 세상이라 왜놈말을 아는것이 결코 해되는것은 아니였다.

북주하로부터 도문을 거쳐 두만강을 건느면 기차로 하루길도 채 안되는 길이건만 그가 조선땅에 들어선것은 다섯해후였다.

두만강이 아니라 압록강을 건너 평안도땅에 들어섰던것이다.

망국의 비운이 숨막히게 뒤덮인 땅 어디에 따뜻한 집이 있고 후더운 인정이 있으랴.

하지만 여기가 바로 조선땅이라는 말에 열일곱살의 처녀는 인생의 숙원이 풀리기라도 한것 같은 반가움으로 눈물을 왈칵 쏟았었다.

만나는 사람마다가 양주공장의 잊지 못할 영무오빠, 관길오빠, 봉빈오빠, 봉순언니처럼 느껴졌다.

그들의 고향도 이 땅에 있겠구나.

이 땅 어디가 그들이 그렇게도 못잊어하던 고향일가?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

…… ……

영옥이와 봉순이가 밤마다 손잡고 눈물겹게 부르군 하던 노래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그렇듯 향수에 들뜬 처녀에게 제일먼저 손을 뻗친것은 사각모자를 쓰고 어깨에 스키들을 멘 두명의 대학생들이였다.

어린시절 도꾜에서 흔히 보군 하던 대학생들이라 가슴이 철렁했다.

좀 서툴긴해도 그들도 조선말을 하는걸 보고서야 마음을 놓았다.

반가움의 눈물을 머금었다.

눈길에서 꽁꽁 언 그를 위해 불을 피우고 저들의 볼에 둘렀던 따스한 털목도리도 목에 둘러주었던것이다.

저녁에는 어느 려관으로 데리고갔다.

려관에 가서야 그는 그 대학생들이 겨울방학을 맞아 조선으로 탐방려행온 일본인들이라는걸 알았다.

두 대학생은 더욱 친절하게 따뜻한 욕실에서 목욕을 하게 하고 기름진 료리들로 저녁도 대접했다.

보기만 해도 포근한 비단이불이 기다리고있는 아늑한 침실도 마련해주었다.

너무도 고마움이 큰 그는 잠자기 전에 인사라도 하려고 두 대학생이 거처한 방으로 갔다.

방문을 두드리려던 그는 소스라쳐 놀랐다. 미닫이문안에서 두 대학생이 일본말로 주고받는 말을 가려들었던것이다.

《…그래, 이젠 어떻게 하려나?》

《어떻게 하긴, 익힌 열매는 먹기마련이지, 오늘밤부터 실컷 재미를 보세나.》

《그다음은?》

《겁이 나나? 걱정말라구. 일본군 있잖나. 굶주린 수개같은 그것들한테 주어보지.》

《너무 잔인하잖나?》

《잔인? … 자네 몸에 혹시 조선사람의 피가 섞인건 아닌가? 이봐, 〈대동아공영권〉을 실현하자면 피부터 순수해야 해. 우리 일본의 피, 야마도 다마시정신… 알겠나? …자, 이젠 가보자구. 난 더이상 참을수 없어.》

그는 어떻게 그 려관을 뛰쳐나왔는지 몰랐다.

캄캄한 밤.

광란하는 눈보라.

그는 비로소 자기가 함정도 무서운 함정에 빠졌댔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아니, 조선이건 중국동북이건 이 세상은 어딜 가나 지옥이고 함정이라는것을 알았다.

짐승같은 일본야만들이 어딜 가나 뒤덮여있다는 생각에 몸서리가 쳐지고 앞이 캄캄했다.

살고싶지 않았다. 울며울며 산속을 달렸다.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다. 왜 우는지도 몰랐다.

울고 달리고 어푸러지고… 다시 일어나서는 또 울며 달리였다.

종시 쓰러지고말았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것은 산중의 볼품없는 초막안에서였다.

한겨울 이와실이를 하던 한인준이 다 죽게 된 그를 발구에 실어왔던것이다.

이것은 한인준이 광산으로 들어오기 한해전 일이였다.

한인준은 불쌍한 그를 친동생으로 삼아 그의 이름에 자기의 성을 달아주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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