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5(2016)년 3월 18일
《생명》

제 1 장

10

서늘한 골바람이 메마른 가랑잎들을 휘몰아다가 골개천의 웅뎅이에다 덮어버렸다.

새벽이면 살얼음이 지는 산골의 마가을이였다.

로철정은 원산시려단에서 담당한 1호발전소건설장과 압력철관로건설장을 돌아보고있었다.

계절의 영향을 제일 많이 받는 압력철관로고정대의 콩크리트시공을 최대한으로 앞당겨끝낼데 대한 도당위원회의 결정을 집행하기 위해 벌써 여러날째 여기에 나와살다싶이 하는 로철정이다.

그가 허금호와 김성철과 함께 여러명의 시공참모들을 데리고 1호발전소 지하타빈실에까지 내려가 시공정형을 료해하고났을 때는 새벽교대휴식시간이였다. 기초굴착작업을 하느라고 아래도리가 돌가루물에 젖은 돌격대원들이 모닥불둘레에서 떠들썩 고아대고있었다.

여러명의 돌격대원들이 한 대원을 둘러싸고 몰아댔다. 나어린 녀성돌격대원들까지 합세하여 다그어대는 바람에 몰리우는 친구는 얼굴이 시뻘개가지고 어쩔줄 몰라 쩔쩔매였다.

녀성돌격대원들속에서 오목눈이 만만치 않은 장미경이 눈물이 글썽해가지고 냅다쏘았다.

《그런 당치 않은 소리를 돌리는 사람들은 모두 비판무대에 올려서 혼쌀내야 해요.》

《누구야, 그따위 허튼수작을 줴친 장본인이?

돌격대에서 쫓겨나지 않으려거든 똑똑히 말하란 말이야.》

바람에 모닥불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신동진이 목청을 높이였다.

《이 발전소건설이 15년이나 걸린다구? 어떤 훼방군들한테서 들었는지 똑똑히 대란 말이야.》

신동진은 어찌나 열이 올랐는지 당장 한대 쥐여박을듯이 노려보았다.

몰리우던 대원이 떠듬떠듬 사실대로 말했다.

《시공참모들이 하는 말이 콤퓨터모의건설결과에 그런 답이 나왔다오.

콤퓨터라는거야 거짓말을 모르는게 아닌가 말이요. 난 그 소리를 듣고 사기가 떨어져서 기업소에다 내려보내달라고 제기하려던 참이요.》

여러 돌격대원들이 분개하여 웨치였다.

《누가 그따위 쓸개빠진 모의건설을 했대?

도대체 누가?! 이건 분명 발전소건설을 달가와하지 않는 불손한 의도란 말이야!》

《상급에 제기해서 되게 문제를 세워야 해!》

저마다 겨끔내기로 떠들어대자 주위는 더욱 소란해졌다.

돌격대원들속에서 한 친구가 새된 소리로 웨쳤다.

《아, 이거 간부들이 가까이 있는데 부끄러운줄도 모르고 떠들어대는구만. <암하로불>들끼리 쪽박을 깨면서 싸움질일랑 그만하라구.》

자기는 평안도태생이라면서 은근히 강원도사람들을 깔보기 잘하는 앙바름한 체격의 돌격대원청년이 조소의 눈길을 보내였다.

신동진이 이번에는 분격의 화살을 평안도내기한테 돌리였다.

《이건 또 뭐야? 우리가 <암하로불>이라구?

우리가 <암하로불>이면 넌 뭐야?》

《나야 평안도내기니꺼니 <맹호출림>이지!》

그 소리에 신동진이 목청을 돋구었다.

《뭐, <맹호출림> 이것 봐라, 그러니 우린 바위아래 앉아있는 늙은 중이구 자넨 수풀속에서 뛰여나온 사나운 범이란 말이지.

그따위 쓸개빠진 소리를 다시 하겠어?

그거야 수백년전에 조상들이 가져다붙인 대명사가 아닌가. 지금의 강원도사람들은 모두 전투원이란 말이야.

하긴 지금도 <암하로불>이 있다면 정신나간 콤퓨터모의건설을 한 사람들이야.

내 어떤 사람들이 그따위 15년설을 내돌리였는지 밝혀내고야말겠어.》

돌격대원들의 싱갱이를 듣고있던 허금호는 얼굴이 지지벌개졌다.

로철정은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그것은 분명 허금호와 시공참모들이 의뢰하여 공업대학의 정보과학 연구사처녀가 진행한 모의건설결과를 두고 벌어진 싱갱이였다.

의도는 어떠했던지 돌격대원들속에서는 좋지 않은 후과가 빚어지고있는것이다.

철정은 방금전에 사태를 알아보려고 달려온 영훈의 얼굴에도 랑패감이 어린것을 띄여보았다.

학우였던 처녀연구사의 모의건설을 중지시키지 못했던 자신을 질책하고있는지도 몰랐다.

영훈이 돌격대원들한테 다가갔다.

그가 설득력있는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동무들, 그런 소리를 듣고 우리끼리 다투면 되겠소? 그런 소리에 좀 기분이 상할수는 있지만 깜짝 놀랄 우리가 아니요. 우리는 마땅히 15년설이 비과학적인 소리라는걸 우리의 힘과 정신력으로 증명해야 하오.

자, 교대시간이 가까워오는데 어서 작업장을 정리하고 인계준비를 합시다.》

로영훈의 말에 돌격대원들은 군소리없이 작업장으로 향하였다.

로철정은 현장지휘부 사무실에 돌아왔다.

허금호는 언제 자리를 떴는지 보이지 않았다.

아침해살이 창문으로 비쳐들고있었다.

새벽교대들의 작업실태를 료해하느라고 밤밝힌 그였으나 피곤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은연중 갈마드는 불안에 눈살이 꼿꼿해졌다.

허금호와 일부 시공일군들이 난해한 공법문제들을 해명하느라고 몇가지 프로그람과 모의건설을 의뢰했다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그처럼 좋지 않은 후과를 가져올줄은 미처 몰랐다.

15년설은 돌격대원들보다 허금호를 병들게 한것이 분명했다.

그에 대하여 생각이 깊어졌다.

허금호는 이즈음 말없이 사무실에 우두커니 앉아있거나 아프다고 며칠씩 몸져누워있으면서 공사지휘에 공백을 내는 때가 드문했다.

허금호는 확실히 병들어가고있었다.

막역한 사이에 꼬집어 질책할수는 없고 어린애처럼 달랠수도 없는 일이였다.

실천을 통하여 15년설의 허위성을 증명하고 그것을 믿는 사람들을 깨우쳐주어야 한다는 영훈의 말은 옳지만 그것은 시간을 요하는 일이고 지금 당장은 금호를 번쩍 정신들게 해야 하는데 어떤 방법을 택해야 할지 알수 없었다.

그무렵에 려단직일관이 나타나 식사시간이 지난다고 일깨워주었다.

식사를 하고나자 못 견디게 피곤이 다몰려왔다. 쏘파에 기대여 눈을 감았으나 새벽에 있은 일이 떠올라 쪽잠에도 들수 없었다.

잠시 궁싯거리고있는데 전화종소리가 들려왔다.

박경진비서였다.

늘 침착하고 온화하던 그의 목소리가 찌륵대는 전류소음에 섞여 성급하게 들려왔다.

《방금 한 초급당비서가 전화한데 의하면 발전소건설이 15년이나 걸린다는 소리가 떠돌고있어 그 단위에서 보낸 돌격대원들속에서 동요하는 현상이 나타나고있다는겁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자세히 알고싶습니다.》

로철정은 사실대로 알려주지 않을수 없었다.

박경진이 격한 목소리로 문제의 본질을 까밝혔다.

《돌격대원들속에서 우연히 떠도는 소리가 아니라 콤퓨터모의건설결과에 나온 동요라는겁니까. 그렇다면 문제가 있습니다.

자, 보라. 이처럼 오래 걸릴 방대한 건설을 우리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국가투자도 받고 성과 내각의 방조를 받아야만 할수 있다는 결론을 끌어내자는 의도가 아닙니까?》

로철정은 심사숙고해야 했다.

《시도는 그렇지 않았지만 후과가 좋지 않게 나타나고있어 생각이 많아집니다.

책임적인 지휘관들속에서도 15년설을 믿는 현상이 나타날수 있어 대책을 모색하고있습니다.》

로철정이 자기의 견해를 명백히 밝히였다.

박경진은 신중한 어조로 말했다.

《이건 엄중하고 심각한 사상문제입니다.

된바람을 일으켜 대오안에 패배와 동요가 머리들지 못하게 하여야 합니다.

우선 로영훈동무한테 돌격대원들속에서 절대로 그런 소리를 돌리지 못하도록 하며 거기에 넘어가서 심리적고충을 겪는 사람들이 나타나지 않게 해야겠습니다.》

박경진은 잠시 말을 맺었다.

자신보다 먼저 상대방이 겪고있는 가슴아픔을 헤아릴줄 아는 그였다.

송수화기를 든채 잠시 시간이 흘렀다.

박경진의 목소리가 또다시 즈렁즈렁 공명판을 두드렸다.

《책임자아바이, 숨가쁜 일들을 안고 모대기는 모습이 눈에 선히 보입니다.

어찌겠습니까. 강행군길에는 락오자도 있기마련인데 모두 이끌고 달리는게 지휘관이 아니겠습니까. 난 지금도 책임자아바이한테서 장가들던 이야기를 들은게 문득 떠오르군 한답니다.

부인의 어린시절이야기가 힘이 될적이 한두번이 아니였습니다.》

철정은 박경진이 우연히 그 말을 꺼내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박경진은 부디 앓지 말라고 거듭 당부한 뒤 전화를 끊었다.

철정의 눈앞에는 사랑하는 안해와의 첫대면이 있었던 먼 청춘시절의 나날이 화면처럼 펼쳐졌다.

…로철정의 첫 로동생활은 천리마대고조시기 크지 않은 건재공장의 기계기사로부터 시작되였다.

벽돌과 오지관따위를 구워내는 공장이였다.

리상과 포부가 남달리 컸던 그는 자기의 모든 희망을 이루기 전에는 장가를 들지 않겠노라고 결심했다. 전쟁시기에 대피시켰던 녹쓴 치차며 전동기들을 파내여 고심끝에 벽돌성형기를 조립해낸 여름날 공장은 명절마냥 들끓었다.

그의 목에는 여러개의 꽃목걸이가 걸리였고 그는 열번도 넘게 공장일군들과 청년들의 손에 떠받들리여 공중으로 떠올랐다.

나중에는 지배인의 조카라고 하는 인물환한 처녀까지 나타나서 큰아버지가 제일로 고심하던 일을 풀어주어서 고맙다며 고뿌에 철철 넘치게 맥주를 부어주었다.

총각은 생면부지의 처녀가 내미는 고뿌를 받아야 할지, 받지 말아야 할지 몰라 잠시 망설이고있었다.

《사람두 참, 우물쭈물할게 있나. 처녀의 축하인데 어서 쭉 받아마시게.》

지배인이 재촉해서야 그는 난생처음으로 맥주를 마셔보았다.

얼굴이 벌거우리해지고 마음은 흥그럽게 들떠졌다.

그는 대범하게도 처녀와 몇마디 말까지 주고받았다.

이름은 박정금, 나이는 스물세살, 어느 공장 유치원교양원을 하고있다고 했다.

처녀는 큰아버지가 오늘 공장에 경사가 났으니 꼭 들려달라는 전화를 걸어와서 내려왔다는것이였다.

후에 안 일이지만 지배인의 마음은 딴데 있었다.

어느모로 보나 탐나는 재간둥이총각 철정을 조카사위로 맞고싶었던것이다. 철정은 쌍겹눈이 류달리 아름다운 처녀앞에서 눈길을 허둥거리지 않을수 없었다.

처녀는 두번째 잔의 맥주를 다 마실 때까지 미소를 짓고 바라보다가 이내 관심이 없다는듯 다른데로 눈길을 돌리는것이였다.

그뒤로 처녀는 문득문득 철정의 눈앞을 막아섰다.

잊으려고 해도 처녀의 상글상글 웃는 두눈은 때없이 철정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어느날 뜻밖에도 성형기조작이 잘못되여 오작사고가 났다.

모가 반듯하지 않고 규격이 크거나 작은 진흙떡들이 제멋대로 뚤렁뚤렁 떨어져나왔다. 공교롭게도 로철정이 기대를 조작할 때였다.

가까이에서 그 모양을 지켜보던 지배인이 슬며시 다가와 전동기스위치를 꺼버렸다.

《허, 이 친구 골병이 들었군.》

지배인은 빙그레 웃으면서 철정이 처녀생각에 옴해서 그랬을거라고 롱삼아 말했다.

오작사고는 간단히 퇴치되였다. 조작실수였던것이다.

그날 저녁에 지배인이 합숙에 찾아왔다.

마침 호실의 다른 친구들은 밤교대에 나가고 철정이 혼자만 남아있었다.

지배인이 정색한 눈길로 철정을 바라보며 진심으로 말했다.

《이거 내 웃사람구실을 못하였네.

일시킬 생각만 하고 장가보낼 생각을 못했거던. 계속 이렇게 합숙생활만 할수 없지 않나.

우리 조카딸이 어떻던가? 이번 일요일에 부를테니 얘기를 나눠보고 서로 마음에 들면 제꺽 혼사를 치르자구.》

전쟁때 351고지에서 소대장으로 싸웠다는 지배인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전 뭐 아직 장가들 생각이 없습니다.

일을 많이 한 뒤에나…》

철정은 이전날의 조작실수를 지배인이 정말로 자기가 처녀생각에 옴해서 저질렀다고 생각하는것만 같아 부끄러웠다.

지배인은 군말없이 일요일날 다른데 가지 말라고 당부하고는 자리를 일었다.

일요일까지는 사흘이 남았었다.

철정은 그동안에 벽돌성형기의 속도를 한배반으로 높일 결심으로 밤교대에까지 나와서 머리를 썼다. 일요일 아침녘에 그가 새 기술도입의 실머리를 잡고 너무도 기뻐서 기사장을 찾아갔을 때였다.

기사장도 매우 기뻐하면서 빨리 합숙으로 가보라는것이였다. 누가 찾아왔다고 했다.

누가 왔을가? 하여튼 일이 잘되는 때라 그는 흥뜬 마음으로 달려갔다.

가면서 그는 오늘이 일요일이며 지배인이 처녀를 데리고 오겠다던 생각을 했다.

그는 작업복주머니에서 사각거울을 꺼내여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진흙과 검댕이가 묻어있는 얼굴은 볼성사나왔다.

그러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모두 일에 몰두하고있는 때이니 곱게 보이느라고 왼심쓸 필요도 없을것 같았다.

철정은 어깨를 높이고 합숙마당에 들어섰다. 지배인이 싱글거리며 합숙나들문앞에 서있었다. 처녀는 보이지 않았다.

《어서 옷을 갈아입게. 처녀가 사감실에 와서 기다리네.》

처녀가 기다린다니 미안했다.

《옷이야 뭐랍니까, 일하던 차림인데.

얼굴이나 문대고 만나겠습니다.》

철정은 가서 찬물로 얼굴을 씻고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아무래도 진흙투성이옷을 갈아입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바지를 벗고 창문을 열었다.

이날의 날씨를 일기에 정확히 기록하기 위하여 하늘을 가늠해보았다.

맑고 창창한 가을날이였다. 제비들이 높이 날았다. 정원의 감알들이 무르익고있었다.

해는 창공높이에서 밝고 따스한 빛을 열심히 내뿜었다.

붕- 하는 소리와 함께 금박칠이라도 한듯 호박꽃가루를 온몸에 가득 들쓴 꿀벌 한마리가 열려진 창문을 향하여 맹렬한 속도로 날아오다가 자기의 령공이 아님을 깨쳤던지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공중으로 날아가버렸다.

《준비됐나?》

군대식억양과 성격이 그대로 남아있는 지배인이 싱긋 웃으며 문을 열고 들여다보았다. 철정은 혁띠를 조여매면서 지배인의 구령식억양과 팔팔한 군인성격이 한생 변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뭐 별로 준비랄게 있습니까?》

《일생 함께 살아야 할 사람을 맞아야 할텐데 준비할게 없다니?》

지배인이 철정의 경솔한 대답을 시정시키듯 엄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러다가 이내 총각의 말을 긍정해주었다.

《하긴 그렇지, 제 모습을 본래대로 드러내보이면 되는거야.

나도 꾸미는건 딱 질색이라니까. 위장이라는거야 군대에서 적을 속이기 위해서나 필요한거지.

그렇지, 자네가 요즈음에 읽고있는 소설책을 펼쳐들고있으라구. 내가 조카딸에게 자네가 무서운 애독가라고 했으니까. 우리 앤 그런 사람을 무척 좋아한다니까.》

지배인은 나갔다.

철정은 도무지 소설책을 펼쳐들게 되질 않았다.

그게 오히려 어색했다. 그는 덤덤히 앉아서 처녀가 나타날 시각을 마음조이며 기다렸다.

잠시후에 손기척이 들리더니 살며시 문이 열렸다.

박정금은 나들문을 닫으며 방안을 한바퀴 휘둘러보았다.

그리고는 앉을 자리를 찾듯 잠시 총각의 얼굴에 눈을 주었다.

철정은 미처 주인의 례절을 차릴 사이도 없이 정금의 아름다운 용모에 슬그머니 반해버렸다.

《여기 앉으시오.》

그는 하나뿐인 의자를 가리키며 앉지 않고 서성거렸다.

《전 여기에 앉지요.》

처녀는 스스럼없이 약간 덞어진 백포가 씌워져있는 총각의 침대가장자리에 앉았다.

그들은 이미전에 만났던적이 있는지라 스스럼없이 화제를 이끌어갈수 있었다.

《일이 힘들지요?》

정금은 어여쁜 눈길을 살짝 치켜뜨며 철정을 마주보았다.

《힘은 듭니다. 하지만 재미있습니다.》

총각의 깍듯한 경어에 처녀는 약간 무안해하면서 《아이, 말씀 낮추세요.》라고 말했다.

잠시후에 철정은 자기의 지난날과 현재에 대하여, 특히 아버지없이 어머니의 손아래에서 자라면서 겪은 이야기에 대하여 말했다.

처녀는 자기의 지난날을 별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다만 전쟁때 부모를 잃고 외삼촌인 지배인을 아버지삼아 그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는것만을 이야기했다.

처녀는 순진한 속마음이 그대로 내비치는 어글어글한 눈에 수집은 미소를 머금고 꾸밈없이 자기의 심정을 터놓았다.

《전 외삼촌한테서 철정동지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전 동지가 아무것도 없는 빈터에서 자체로 벽돌성형기를 만들어냈다는 소리를 듣고 몹시 감동되였어요.

전 그처럼 자기 힘으로 앞길을 개척해나갈줄 아는 사람들을 존경한답니다.》

처녀는 총각의 반응을 기다리지도 않고 합숙방안을 둘러보았다.

창턱에 놓여있는 싱싱한 봉선화화분이며 책꽂이안에 차곡차곡 꽂혀있는 소설책들과 기술도서들…

어떤 아낙네의 수수한 솜씨가 수놓은 거친 혼방직천홰보의 소나무와 학이며 공장목수가 재간껏 만든 자그마한 책상과 걸상, 가물철에는 이따금 찌그덕소리가 나는 소나무침대…

처녀는 지금 그 침대모서리에 출렁대는 물결우에 뜬 쪽배라도 탄듯 조심스러운 몸가짐으로 앉아있었다.

외삼촌댁의 방조를 받으며 정히 다려입었을 곤색스프치마와 옥같이 흰 옥양목저고리는 처녀의 몸에 잘 어울리였다. 희고 고운 목을 두르며 앞가슴에서 정히 맞닿은 저고리의 새하얀 동정이 얼마나 맵시있게 보였던지 철성은 홀린듯이 처녀의 옷매무시를 바라보았다. 창문에서 들어오는 해빛을 마주하고있어 마치 무대조명이라도 받은듯 한 정금의 얼굴은 이전보다 훨씬 아름다왔다.

쌍겹진 눈까풀안에서 별처럼 령롱한 두눈이 매력있게 빛을 뿜었다.

별로 화장을 하지 않은 처녀의 생신한 자연미는 철정을 매혹시켰다.

무대에 내세우면 수많은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될 미모의 처녀가 진흙과 기름때 오른 기계부속이나 주무르는 현장기술자총각앞에 나타난것이 어느모로 보나 현실같지 않아 철정은 슬그머니 자기의 손잔등을 꼬집어보기까지 하였다.

분명 꿈이 아니라 생시였다.

순간부터 철정은 말문이 닫겨버렸다. 시나 소설에서 읽은대로 아름다운 말들을 골라서 사랑을 고백할수 있었건만 어쩐지 입술이 굳어져버렸다.

그는 드디여 자신이 그 어떤 가늠 못할 모순에 빠져있으며 그로 하여 불안에 잠겨있음을 깨달았다.

운명을 결정하는 중대사를 젊은이들끼리 몇순간 마주앉아서 결정지을수는 없었다.

철정은 화제거리에 궁해졌다. 그는 어처구니없게도 며칠전에 있었던 성형기조작실수에 대하여 장황하게 이야기했다. 따분하고 별로 신통한 이야기가 아니였건만 처녀는 두눈을 반짝이며 재미있게 들어주었다.

시간이 흘렀다. 처녀는 돌아가야 했다.

철정은 두사람의 문제를 서둘러 결정짓지 말자고 하면서 자기는 어머니를 만난 다음에 결심하겠다고 했다.

처녀는 그의 말에 기꺼이 동의했다.

철정은 즐거운 기분으로 처녀와 헤여졌다.

그리고는 그다음 휴식일에 100여리밖에 떨어져있는 어머니를 찾아갔다.

철정은 어머니앞에서 처녀에 대한 이야기를 차근차근 들려주었다.

《처녀가 고아란 말이지?!》

어머니는 한편으로는 반가와하면서도 어덴가 애매하고도 불안한 인상이였다. 어머니의 조용한 한숨은 철정이의 마음을 저으기 실망케 했다.

어머니의 우려는 다른것이 아니였다. 부모없는 처녀가 어린시절부터 교양없이 자랐을가봐 걱정이라는것이였다.

사실 철정은 그 어려운 세월에 남편에게 모든것을 의탁하고 버릇없이 되는대로 살아가는 녀자들을 한둘만 보지 않았었다. 대체로 부모없이 막자란 처녀들이 말송사질에 끼우기가 일쑤였다. 말은 없었지만 어머니의 심사숙고는 철정을 버쩍 정신들게 하였다. 구체적으로 료해해보지도 않고 덤벼치다가 막된 처녀를 안해로 맞으면 장차 어떻게 살아가랴 하는 생각이 서서히 온몸을 사로잡았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녀성을 선택함에 있어서 아름다운 용모만을 념두에 두는것이 아니였다.

여기서 철정의 리성과 감성은 불꽃을 튕기며 싱갱이를 일으키였다.

만약에 어머니의 우려를 고려하지 않고 처녀의 인물에만 반하여 생활력없고 버릇없이 자란 처녀를 안해로 맞아 실망케 한다면 인생의 커다란 실패로 될것이다.

그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면서 이 성급한 혼약을 보류하기로 하였다.

한가지 걱정은 지배인에게 볼낯이 없는것이였다.

지배인은 로철정이 공장에 나타나자마자 사무실로 불러들이였다.

《그래 어머니가 찬성하시던가?》 지배인은 조카딸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며 물었다.

《저 사실… (철정이는 갑자르며 대답했다.) 어머니는 처녀가 고아로 자랐다는 소리에 실망하시면서 지내 덤비지 말라고 했습니다.》

철정은 얼굴이 불그레하게 달아올랐다.

지배인은 깊은 생각에 잠기여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의 얼굴에 보기드물게 수심이 어리였다.

전선에서 온갖 구령과 명령으로 전사들을 능란하게 움직여 미제놈들을 삼대베듯 쓸어눕혔던 소대장으로서는 결단과 완력으로 해결할수 없는 이번일이 커다란 타격으로 되지 않을수 없을것이였다.

철정은 몸둘바를 모르고 서있었다.

지배인은 총각을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세상물정에 대한 체험과 파악이 너무도 부족한 총각의 우려가 지배인은 리해되였다.

지배인은 차근차근 말했다.

《옛사람들은 흔히 과부집처녀나 홀로 자란 일부 처녀들은 버릇이 없고 거칠게 자랐다고 랭대를 했다네. 일리가 있는 소릴세. 그러고보면 자네는 경솔한 총각은 아닐세그려.

신중한데가 있거던. 그런걸 리성의 지배를 받는다고 하지. 하지만 오늘에 와서 옛사람들의 말을 다 곧이곧대로 믿는건 실패의 근원이기도 하네.

왜냐하면 우리가 살고있는 새시대가 지나간 수십년의 력사와 조금도 비슷한데가 없기때문이야.》

이렇게 서두를 뗀 지배인은 또다시 담배 한대를 붙여물더니 심중하게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우리 조카딸 정금의 어린시절이야기를 들어보면 자넨 아마 깜짝 놀랄거네.

정금은 열살나이에 전쟁을 겪게 되였지. 내가 전선에 나가있을 때 말일세.》

지배인은 신중한 낯색을 지으며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철정은 뜻하지 않게도 정금의 소녀시절 이야기를 듣게 되였다.

…전쟁이 일어나자 정금의 아버지는 전선에 탄원하였고 어머니는 전선원호의 앞장에 서서 일했다.

그러던 그의 어머니는 다리복구에 나갔다가 미국놈의 폭격에 잘못되였다. 열살난 정금이와 여섯살난 남동생을 외삼촌댁이 데려다 키우게 되였다.

외삼촌댁한테도 두살짜리 계집애와 네살짜리 남자애가 있었다.

소학교 교원이였던 외삼촌댁은 메밀과 보리를 타개고 갈아서 죽을 쑤어 아이들을 먹이면서도 학교에 나가 학생들을 가르쳤다.

일시적인 전략적후퇴가 시작되였다.

마을사람들은 유격대에 들어갔거나 북으로 갔다.

하나 외삼촌댁만은 네아이들에게 발목이 잡혀 오도가도 할수 없는 몸이 되였다.

《치안대》놈들은 인민군대후방가족으로서 아이들에게 빨간물을 들인 악질빨갱이라고 외삼촌댁을 끌어다 고문하면서 종내 내놓지 않았다.

정금이는 졸지에 세아이의 보호자가 되였다.

젖뗀지 얼마 안되는 두살짜리 막내아이는 껄껄한 보리죽을 먹어내지 못하였다.

설사에 감기까지 겹친 어린것은 밤새껏 울며 보채였다.

그러면 여섯살잡이, 네살잡이애들까지도 엉엉 울며 엄마를 찾았다.

정금이마저도 가슴이 미여지는듯 했으나 입술을 옥물고 절대로 울지 않았다.

이제는 그가 나어린 세아이의 보호자가 되여야 했던것이다.

집에 흰쌀이라고는 한알도 없었다.

단지 보리쌀과 메밀이 조금 있을뿐이였다.

망을 돌릴 힘이 없었던 그는 메밀을 다듬이돌우에 한웅큼씩 올려놓고 납작한 조약돌로 비벼서 껍질을 벗기였다. 그다음에 한웅큼씩 쥐여 입김을 훌훌 불어 껍질을 날리여 메밀쌀을 내였다.

나무가 떨어지자 뒤산에 올라가 마른 솔잎을 긁어다가 메밀, 보리가 섞인 죽을 쑤었다.

죽이 끓으면 소금을 약간 두어 간을 맞추고 아무 반찬도 없이 그걸 먹어야 했다.

정금은 숟가락도 쥘줄 모르는 두살잡이와 네살잡이의 입에 죽을 떠넣어주었다.

애들은 깔깔한 메밀나께가 목에 걸릴 때마다 안 먹겠다고 도리질을 하면서 보채였다.

밤새껏 엄마를 찾는 아이들을 달래느라고 정금은 잠을 못자서 눈에 벌겋게 피가 졌고 애들이 죽을가봐 겁이 나서 함께 붙잡고 모지름을 쓰며 눈물짓군 하였다.

제일 두려운건 성냥마저 떨어져가는것이였다.

마지막성냥가치를 써버린 뒤부터 정금은 불씨를 화로에 담아놓고 재를 덮어놓았다.

아침에 일어나 부저가락으로 헤집어보니 까치밥열매만치 작은 불통 몇개가 겨우 살아있을뿐이였다. 정금은 그우에 노랗게 마른 솔잎을 올려놓고 볼이 아프도록 입바람을 불어 겨우 불을 살려내였다. 추위는 점점 엄습해왔다.

보리자루와 메밀자루는 나날이 작아졌다.

저걸 다 먹으면 어찌하나?

근심과 설음에 잠긴 정금은 동생들 몰래 눈물지었다.

새벽에 행길에 나갔던 정금은 간밤에 산에서 내려온 유격대가 붙여놓은 삐라를 읽어보았다.

《인민군대는 곧 나온다. 미국놈들에게 죽음을 주라!》

그는 기뻤다.

인민군대가 곧 나온다니 기껏 열흘쯤 있으면 외삼촌어머니도 놓여나올것이다.

한달을 견디여냈으니 이제 열흘만 더 견디여내자.

정금이는 보리와 메밀을 한줌두줌 세여 열몫으로 나누었다. 이제부터 그는 그것이 한몫두몫 줄어들 때마다 겁이 나는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은연중 기쁨이 커갔다.

그 마지막몫을 가마에 안치고 불을 지피는 날 저녁무렵이였다.

달아나면서 무턱대고 쏘아대는 적들의 총포소리가 온밤 촌락을 들었다놓았다.

찢어진 문창호지를 휘딱휘딱 밝히였다가 스러지는 화광에 정금은 오돌오돌 떠는 아이들을 이불속으로 끌어들여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게 했다.

두툼한 이불솜이 총탄과 파편을 막는다는 어른들의 말을 믿은것이였다.

인민군대가 한밤중에 마을을 지나 남쪽으로 진격해갔다.

귀에 익은 만세소리와 《가슴에 끓는 피를 조국에 바치니 영예로운 별빛이 머리우에 빛난다》라는 노래소리에 정금은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날이 밝으면 반드시 외삼촌어머니가 오실것만 같았다. 정금은 아이들을 어엿한 모습으로 어머니앞에 내세우고싶었다.

박우물을 길어다 큰 가마에 채우고 불을 지폈다.

물이 따끈해졌을 때 애들을 깨웠다.

《얘들아, 이제 어머니가 오신다. 미역감고 새옷을 갈아입자.》

철없는 아이들도 어머니가 온다는 소리에 너무 좋아 손벽을 짜락짜락 치며 돌아갔다.

아이들을 큰 버치에 들여앉히고 해말끔히 때벗이를 시키였다.

인민군대에 의하여 구원된 외삼촌댁이 동틀무렵에 종주먹을 쥐고 달려왔다.

그 녀자는 네아이의 주검을 보게 되리라는 끔찍한 환각에 사로잡혀 거의 실신한 사람마냥 머리를 산발한채 방문을 박차고 들이닥쳤다.

그런데 놀랍게도 두눈에 영채도는 귀여운 아이들이 한구들 앉아있다가 반기는것이 아닌가.

《얘들아!》

그는 두팔 벌려 아이들을 한품에 얼싸안았다.

피골이 상접한 얼굴, 상처투성이의 온몸, 찢어진 치마저고리…

《얘들아, 내가 왔다. 엄마가 왔어!》

아이들은 변함없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왕- 하고 울음을 터치며 매달렸다.

외삼촌댁은 근 40일동안 아이들만 남아서 죽지 않고 살아난것이 꿈만 같아 정금이를 붙안고 기쁨의 눈물을 머금었다.

《네가 어른이 다 되였구나. 난 너희들이 다 죽은줄 알았지. 네가 무슨 힘으로 아이들과 함께 지금껏 살았니?》

정금이는 오랜만에 방글거리며 말했다.

《외삼촌엄마! 가면서 말하지 않았나요.

한달만 있으면 꼭 온다구. 그래서 믿고 기다렸지요 뭐.》

외삼촌댁은 너무도 기특해서 정금이의 머리를 오래오래 쓰다듬었다. …

지배인은 더 말하지 않았다.

그는 한두모금 빨다가 불이 죽어버린 담배를 재털이에 던지고나서 일어났다.

《자네 후회하지 않게 되기를 바라네.》

그때까지 눈물이 그렁하여 이야기를 듣고있던 철정이 지배인의 팔을 붙잡으며 자책하였다.

《지배인동지! 용서하십시오.

그런 처녀를 모욕한 저를 말입니다. 정금동무에게- 제가 사죄할텝니다.》

지배인은 나들문가에 다가서서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강요하지는 않겠네. 내 얼굴을 봐서 마음에 없는 대상을 선택하라는건 아니니까.

뭐 구태여 사죄할것까지야 없네. 하지만 자넨 정말 일생에 큰 랑패를 볼번 했다는것만은 명심하라구.》

철정은 무어라 대답을 할수 없었다.

사나이의 두눈에서 후더운 눈물이 드르륵 굴러내렸다.…

로철정의 일생대사는 이렇게 이루어지게 되였다.

그는 그때 일을 상기시킨 박경진비서의 웅심깊은 마음을 헤아리면서 가슴이 후더워오는것을 새삼스레 느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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