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5(2016)년 3월 18일
《생명》

제 3 장

4

경숙은 고열에 시달리며 앓았다. 몸살과 함께 참을수 없는 외로움이 그를 괴롭히였다.

점심시간에 녀군의가 점심을 가지고왔다.

《아침식사를 하다 말았더구만요.》

녀군의는 점심그릇을 원탁우에 올려놓은 뒤 경숙의 이마를 짚어보고나서 두눈을 크게 떴다.

《아니, 열이 높구만요. 지금이 어느때라구 처녀몸으로 찬물에 뛰여든담. 심장마비가 오지 않은것만도 다행이예요.》

녀군의는 혼자 중얼거리면서 해열진통제알약을 주고 팔에다 강심제를 놓았다.

《저녁에 또 올테니 어데 나가지 말고 누워서 땀을 내요.》

군의는 일어서면서 당부했다.

《이젠 오지 마세요. 앓는단 소문도 내지 말구요.》

《좋은 일 하고도 뭐가 부끄러워서 그래요.》

군의는 빙그레 웃으면서 문밖에 나섰다.

해기울무렵에 나들문을 두드리는 손기척소리가 들려왔다.

《경숙동무 있소?》

뜻밖에도 영훈의 다감하고도 웅근 목소리였다.

아래목에 누워있던 경숙은 그만에야 화뜰 놀라 일어났다. 어쩌면 공교롭게도 머리도 못 빗은채 앓고있을 때 찾아온담.

시내에 선보러 갔다가 늦게야 왔을거라는 생각이 들자 느닷없이 속이 아릿해났다.

문을 열가 열지 말가, 병문안이 아니라 무슨 요긴한 일때문에 찾아온건 아닐가.

심장은 이런저런 오만가지생각에 시달리며 마치나 쥐고흔들기라도 하듯 뛰놀았다.

그는 잠시후에야 대답했다.

《예, 있어요. 잠간만 기다려주세요.》

경숙은 서둘러 이불을 개고 머리를 비다듬으며 헤덤볐다. 거울앞에서 황황히 머리를 빗고 미안수를 약간 발랐다.

남들이 늘 새침하고 오연한 인상을 준다는 쌍겹눈을 휘둥그레 뜨고 거울속의 자기를 마주보았다.

하루낮사이에 몰라보게 축간게 알리였다.

입술이 까칠하고 눈이 떼꾼했다.

그 모양을 영훈에게 보이자니 부끄러웠다. 그 몰골을 보고 가슴아파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문열기가 주저되였다.

바깥동정을 엿듣노라니 영훈이 잠시 자리를 뜬 모양이였다. 시간을 주느라고 그러는것 같았다.

언제나 사려깊은 그였다.

경숙은 여유있게 방거두매를 끝내고 콤퓨터에 마주앉았다. 그러다가 연극을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구들에 내려앉았다.

진료소 녀군의가 가져왔던 밥그릇이 그대로 있는것이 눈에 띄였다.

어데다 치울가 구석을 살피는데 영훈이 다시금 점잖게 물었다.

《들어가도 되겠소?》

《예, 들어오세요.》

경숙은 서둘러 일어나 문을 열어주었다.

빙그레 웃음을 머금은 어글어글한 두눈이 인정을 담고 바라보았다.

《이렇게 앓고있는걸 인차 찾아와보지 못해서 안되였소.

시내에 나갔다올 일이 갑자기 생겨서 그만…》

경숙은 순간에 다리맥이 풀리여 구들에 물러앉고만싶었다. 그러니 선보러 시내에 나갔다는 미경의 말이 맞았구나.

이런 생각이 떠오르는것을 애써 누르며 경숙은 영훈을 아래목에 앉으라고 권하였다. 그는 환자가 아래목에 앉으라면서 의자에 걸터앉더니 호주머니에서 다래봉지를 꺼내여 경숙에게 들려주었다.

《다래요. 입맛을 젖혔을가봐 시내에 나갔다오던 길에 따왔소.》

경숙은 영훈이 시내에 나갔다오면서도 자기 생각을 해준것이 고마와 다래봉지를 받으면서 한동안 주저하다가 물었다.

《시내에 나갔던 일은 어떻게 되였어요?》

《만날 사람이 없어서 헛걸음을 하고왔소.》

그 말에 경숙의 마음은 한결 개운해졌다.

《어머님이 무척 서운해하셨겠어요?》

《어째서 말이요? 어머닌 내가 시내에 나갔던걸 알지도 못하는데. 이제 30만산에 가면 직관선동도 방송선동 못지 않게 잘해보자는거요. 대형구호판과 속보판들로 공사장을 꽉 채우고 돌격대원들의 아름다운 소행같은것은 제때에 온 건설장이 다 알게 써붙이려고 하오.

시내 한 기업소에 사단직관선동을 잘해서 전사영예훈장까지 받고 제대되여온 동무가 있다는 정보를 듣고 갔댔는데 그만 다른 려단에서 벌써 데려갔다는게 아니겠소.》

경숙은 가만히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그것 참 안되였군요.》

처녀는 지금껏 공연히 속태우고있었던 자신이 우스웠다. 그는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으면서 미경이 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누군가 말하기를 영훈동지가 어머니의 전화를 받고 시내에 선보러 나갔다고 하더군요. 전 속으로 그 일이 잘되여 영훈동지가 빨리 로총각때를 벗기 바랐답니다.》

경숙은 본의아니게 꾸며낸 소리를 했다.

어째서인지 미경의 말이 거짓말이였다는게 알려지자 마음이 즐거워졌다.

영훈도 보통때에는 내성적인 경숙이 활달하게 화제를 이어가면서 기쁜 일이라도 생긴것처럼 웃는 모양을 보게 되자 저도 모르게 벙글서 입귀가 열리였다.

그러던 로영훈이 좀전과는 달리 엄한 인상으로 경숙을 바라보았다.

경숙은 지금껏 그처럼 노염어린 영훈의 얼굴을 본 기억이 없었다.

《경숙동무, 불편한 사람한테 이런 소릴 해서 안됐지만 쓴소리로 듣지 말고 명심해주오.》

경숙은 은연중 긴장해지는 마음을 가까스로 다잡으며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였다. 자기가 무슨 큰 잘못을 했을가 하는 생각이 앞서면서 말을 듣기도 전에 얼굴부터 타는듯 홧홧 달아올랐다.

영훈은 목 갈린 소리로 진중하게 말을 이었다.

《동무가 여기로 자원해나온건 정보과학연구사로서의 사명을 다하자는데 목적이 있지 일반 돌격대원들처럼 로력이나 보충하자는건 아니라고 생각하오. 우린 모두 경숙동무가 수천수만의 손과 발을 대신할수 있는 훌륭한 프로그람들을 내놓기를 바라고있는데 동무는 돌격대원들의 일판에 더 흥미를 느끼고있단 말이요.

전번 구조물사건때나 오늘 아침 양수장에 뛰여든걸 나무라는건 아니요. 동무가 그런 일에서 은연중 자기딴의 긍지와 자부심을 느낀다면 그건 심히 잘못된 사고라는걸 말하자는거요.

오늘 아침의 일도 경숙동무가 아니라 다른 돌격대원의 소행이였다면 방송에도 크게 내불고 속보판에도 대문짝 같은 글로 소개했을거요. 하지만 그 주인공이 유감스럽게도 정보과학자인 경숙동무인 까닭에 침묵할수밖에 없었소.

우리가 경숙동무에게서 무얼 바라고있으며 동무가 여기서 무얼해야 하는가 하는걸 명백히 자각하길 바라오. 다시말하지만 동무는 누구도 대신할수 없는, 경숙동무만의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몰두해야 한다는걸 잊어서는 안되오.

그 사명이 결코 열백밤을 현장에서 새우거나 엄동의 찬물속에 뛰여드는것에는 비길수없이 베차고 힘겹다는걸 누가 모르겠소. 그러나 동문 열백번 쓰러졌다가도 다시 일어나 그 길에서 반드시 성공의 보람을 찾아야 하오.》

경숙은 순간 눈앞이 어질거렸다. 무언가 커다란 잘못을 저지르고 선생님앞에 질책받는 소녀의 심정이라 할가. 그는 자신의 빗나간 사고를 탓하면서 눈물이 솟는것을 입술을 깨물어 가까스로 참고있었다.

영훈이 오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미경이 한껏 추어올리는 말을 기껍게 들으면서 자부심에 취해있지 않았던가. 분초를 다투는 시간에 땀을 낸다면서 누워있던것을 생각하니 쥐구멍에 들어가고싶도록 부끄러웠다.

과학자의 사명이라는 말이 경숙의 뇌리에 따끔하니 인박혔다. 그것이야말로 이 건설장에서 자기가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것이 아니겠는가.

자기의 사명을 못하는 과학자, 한갖 미담거리나 만들어내는데서 만족을 찾는 기술자가 어디에 쓸모가 있단 말인가.

생각하면 할수록 영훈의 타이름에 고개가 숙어졌다.

영훈이 계속했다.

《여기 오기 전에 아버지를 만나 꾸중을 좀 들었소. 경숙동무를 잘 도와서 지식경제시대 과학자, 기술자로서 한몫 크게 하도록 해야 한다고 하시였다오.

30만산대발파를 앞두고 앓아눕게 한건 우리가 곁에 있으면서 일을 쓰게 못한탓이라고 하시면서 치료를 잘 받아 빨리 완치시키도록 하라고 하시였소.

응당한 일이지만 려단장동지와 내가 자책을 하였다오. 경숙동무, 그렇다고 서둘지 말고 치료를 잘 받아 완쾌된 다음에 일어나시오.》

《예, 알겠어요. 이젠 일어나겠어요.》

《아니, 그러지 말고 더 치료받아야 한다니까.》

영훈은 건강을 당부한다는듯 고개를 끄덕여보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시간에 다좇기듯 황황히 멀어져갔다.

영훈이 잠간 들렸다 가자 경숙은 심신이 한결 개운해졌다. 공연히 미경이의 말을 곧이 듣고 마음조이며 우울해졌던 자신이 민망스러웠다.

그가 자기 직분을 위하여 뛰고있는것을 제나름대로 생각하면서 괜히 안타까와하지 않았는가.

그는 콤퓨터에 마주앉아 전원을 넣었다.

그리고는 비닐봉지에서 조글조글하면서도 말큰한 다래 한알을 꺼내여 입에 넣고 그 맛을 음미해보았다. 무어라 말할수없이 향기롭고 달달했다. 세상의 모든 약이 이런 맛이라면 얼마나 좋으랴싶기도 했다.

경숙은 다시는 자리에 눕지 않으리라 마음먹고 부지런히 콤퓨터건반을 두드렸다.

그는 이따금 창밖을 내다보면서 몸에 든 병보다 마음에 든 병이 더 참기 어렵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해는 어느덧 서산에 지고 사위엔 어둠이 깃들었다.

그무렵에 문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미경이였다.

《저녁 가져왔어요. 다래랑. 낮엔 멀리 나가 일하느라고 군의선생한테 점심부탁 했댔는데… 아니, 그런데 몇술 뜨지 않았구만요.》

그러던 미경은 콤퓨터탁우에 있는 다래봉지를 띄여보자 누가 가져왔느냐고 묻듯 두눈을 반짝이며 경숙을 바라본다.

《아니, 이건 누가 이렇게 많이 따왔나요?

여기도 있는데… 신동진동무더러 얘기했더니 글쎄 점심을 게눈 감추듯 하고는 먼데로 가더니 요것밖에 못 따왔다질 않겠나요. 뭐, 많아야 맛인가요. 작아도 약이 되면 되는거지요.》

다래를 두고 이 소리, 저 소리 하면서 경숙을 찬찬히 바라보던 미경이 두눈을 밝게 빛내였다.

《아이, 희한두 해라. 아침에 왔다가 한낮에 가는 고뿔도 있구만요. 언니 얼굴이 환해졌어요.

생기가 돌구요. 무슨 좋은 일 있은거 아니예요?

오라, 이 다래 정치부장동지가 따온거지요?》

《그래.》

경숙은 웃음을 머금고 대답했다.

《보라요, 다래가 명약이라는게 맞지요.

아니, 같은 약이라도 주는 사람손에 달린거예요.》

경숙은 미경의 말이 그럴듯 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여 연방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주었다.

《미경이, 그런데 오늘 정치부장동지가 시내에 나갔던 일은 어머니의 전화때문이 아니였더구나.》

미경은 두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호들갑스레 말했다.

《오, 그 선보러 시내에 나갔다는 얘기 말예요?!

호호호, 그 소리 곧이 들었어요? 난 정치부장동지를 놓치지 말라고 꾸며냈댔지요 뭐.》

《뭐라구?! 요 깜찍한 허풍쟁이 같은거. 어쩜 그런 거짓말도 막 한다던?》

경숙은 미경의 잔등을 콩콩 두드려주었다.

둘이서 한참 재미있게 웃었다.

경숙은 어느새 몸과 마음이 개운해졌다.

미경은 잠시후에 정색하여 물었다.

《연구사동진 어떤 남자를 좋아해요?》

《아이참, 별걸 다 묻는구나. 난 아직 그런걸 생각해본적이 없단다. 미경이나 한번 말해보렴.》

그러자 미경은 늘 생각해두었던듯 서슴지 않고 대답하였다.

《난 말예요, 결패있고 일 잘하고 또 같은 값이면 기술도 있는 그런 사람이 좋아요. 그러면서도 특별한 결함이 없는 사람!》

경숙은 빙긋이 웃으면서 받아주었다.

《미경이가 늘 따르는 신동진동무가 바로 그런 사람이더구나. 미경인 행복하겠어.》

그러자 미경은 살레살레 도리를 젓는다.

《그렇지도 않아요. 그 동문 결함투성이예요.

그 동무의 제일 나쁜 결함은 뭔가 하니 녀자들을 업신여기는거예요. 그는 녀자는 남자에게 의지해서야만 살아갈수 있다나요. 담쟁이처럼 말이지요. 어렵고 힘든 일, 기술있는 일은 남자만 하고 녀자는 보조공이나 하라는거예요. 내가 함마를 잡으면 씩 하고 웃으면서 슬그머니 앗아내서는 약을 올리듯 한손으로 텅텅 정대를 때려요. 착암기도 못 배우게 훼방을 놓군 하지요. 뭐 어머니배속에 들어갔다가 남자로 다시 태여나서 배우라는거예요.

내가 얼마든지 날라갈수 있는 가벼운 막돌도 어느 사이에 닁큼 앗아서는 자기가 들고가군 해서 사람을 무안하게 만들 때가 많거던요.》

미경은 이처럼 신동진에 대한 불만을 터치며 토달거렸다. 경숙은 그 모양이 우스워 방시레 입을 벌리며 그의 마음을 어루쓸어주었다.

《그것두 하나의 사랑이 아닐가?》

《연구사동지두 참, 그게 무슨 사랑이예요? 녀자를 깔보는거지요. 녀자를 힘없는 존재로 보는거란 말이예요.》

《그러니 미경인 동진동무와 영영 손잡을수 없겠구나.》

《왜요? 두고보라요. 난 그 동물 꼭 손들게 할테야요.

녀자도 남자와 똑같이 하자고 마음만 먹으면 못할 일이 없다는걸 실천으로 보여줄테야요.》

미경이 입술을 옥물고 말했다.

《듣고보니 미경이의 말이 옳구나.》

경숙이 긍정해주자 미경은 마음이 개운해졌다. 그는 인상을 밝게 지으며 다시금 물었다.

《연구사동진 어떤 남자가 눈에 들어보이던가요? 어디 한번 들어보자요. 내 짐작되는게 있어서 그래요.》

경숙은 떼질쓰듯 하는 미경의 성화에 대답하지 않을수 없었다.

《뭐랄가? 난 말이야, 자기의 지식과 실력으로 자기 앞길을 헤쳐나갈줄 아는 그런 인격자.》

미경은 두눈을 간잔조롬히 뜨고 잠시 생각하는체 했다.

《그런 사람은 흔치 않을거예요. 려단적으로 보면 정치부장동지 같은분이나 손꼽을지. 맞지요?》

경숙은 응답하지 않고 침묵했다.

미경이 해반주그레 웃었다.

《보라요, 침묵은 찬성이라고 했어요. 사실말이지 정치부장동지 같은 인격자가 어디 쉬운가요?》

《그야 물론이지. 영훈동진 아버지가 간부이지만 아버지를 등대고 한몫 보려는 그런 사람이 아니란다. 지금도 그렇지 않니. 군사복무를 마치고 대학까지 졸업했으면 손쉬운 곳으로 배치받아 갈수도 있었겠지만 어렵고 간고한 수력건설장으로 달려나오지 않았겠니. 어버이장군님께서 제일 간절하게 준공을 바라시는 곳에서 자기 일터를 찾는 사람, 시대가 부르는 곳에 청춘을 바칠 각오를 한 그런 사람을 난 존경해. 영훈동지에 비하면 난 아직 까마득하게 멀었지.》

경숙은 영훈을 긍정하는 사이에 저도 모르게 가슴이 후더워졌다.

미경이 살포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아이, 무슨 시랑송이라도 하는것 같네.》

《시랑송? 호호. 영훈동지에 대해서 이야기할 땐 은연중 마음이 후더워지거던.》

《그게 바로 사랑일거예요. 사랑이란건 보이지 않는 마음속에 깃들지만 남들한텐 제일 잘 보인다고 하더군요.》

《미경이 넌 련애박사로구나.》

《그쯤한거야 뭐 모든 사람들이 다 아는게 아닌가요.》

미경은 새물새물 웃으며 말하다가 정색해졌다.

《난 연구사동지를 처음 만나던 때부터 사람이 배우긴 배워야겠구나 하고 늘 생각하게 돼요.》

《내가 알면 뭘 얼마나 안다고 그러니? 난 교정에서 교재를 통하여 배운것보다 더 많은걸 제대군인대학생들한테서 배웠단다.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떻게는 살지 말아야 하는가.

삶의 지향은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 이런걸 말이지. 심지어는 야영지에서 연기를 피우지 않고 군용밥통을 그슬리지 않게 하면서 밥짓는 법도 배웠구 순식간에 참나물김치 담그는 법도 영훈동지한테서 직접 배웠단다. 제대군인대학생들이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많은걸 제 손으로 만들어내는 신통한 재간을 지니고 사회에 나온게 아니겠니.

졸업할 때 영훈동지를 비롯한 제대군인졸업생들은 영웅의 동상앞에서 맹세했단다. 필요하다면 자신의 생명을 영웅처럼 값높게 바치겠다고.

그리고는 늘 자신을 미완성 4점생이라고 하면서 분발하고있단다.

미경이, 오늘 새벽에 내가 찬물을 막아나설 용단을 내리게 된것도 곰곰히 생각해보면 영훈동지를 비롯한 제대군인들과 함께 학창시절을 보낸 덕이라고 생각되는구나.》

미경은 경숙의 말을 한마디도 빠짐없이 귀담아들었다. 그리고는 호-하고 날숨을 내불고나서 말했다.

《연구사동지가 왜 부장동지를 남달리 존경하는지 알았어요. 하지만 이 건설장에서 정치부장동지와 맞세울만 한 대상은 경숙연구사일뿐이예요.

그런데 연구사동진 늘 부장동지앞에서 지내 자세를 낮추면서 줄나게 구는것 같아요.》

경숙은 방싯 웃고나서 대답해주었다.

《그건 어쩔수 없어. 나는 그에게 콤퓨터를 좀 배워주었지만 그는 나에게 인생의 리치를 깨닫게 해주었단다. 그러니 스승처럼 늘 존경하게 되는거란다.》

미경은 그제야 알겠다는듯 머리를 끄덕이였다.

잠시후 벽시계를 보던 경숙은 자리에서 일어나 콤퓨터에 전원을 넣었다.

《미경이, 내 자료를 좀 보아야겠어.》

《어서 그러라요. 난 곁에서 보면서 기초부터 배울래요.》

《응, 내가 이제 시간을 내서 짬짬이 배워줄게.》

둘이는 마주보며 미소를 지었다.

로철정은 시려단정치부에서 아들과 함께 마주앉아있었다.

밖에서는 땅거미가 지고 저녁식사를 하러 가는 돌격대원들의 합창소리가 들려왔다.

긴 이야기끝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철정이 다시금 뜨직뜨직 입을 열었다.

《그 구조물사건때두 그렇구, 오늘 새벽 양수장사건을 보아두 그래 리경숙연구사야말로 정말 쉽지 않은 처녀다. 난 그가 온실안의 꽃이라면 어쩌랴 했는데 영 딴판이야.

그런데 가만 보면 지휘관들이 그를 잘 돌봐주지 못한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너의 려단구역에 그런 인재를 들여놓았으면 응당 관심을 돌려 맡은 일에 지장이 없도록 매사를 살펴주었어야지. 돌격대대접을 받아봐라!하듯이 방임해두었으니 어쩔번 했니.

일군으로서, 인간으로서 사랑과 인정이 부족한게 탈이야. 하긴 나한테서도 그게 결함이지만.

내 오늘 경숙연구사가 몸져누웠다길래 너무도 가슴이 아파서 달려왔댔다.》

그러던 로철정은 마침 녀군의를 만나 그가 많이 호전되였다길래 안심하고있는중이였다.

《하지만 너나 성철려단장이야 이미 찾아가보았어야지.》

로철정의 음성은 낮았으나 억양은 준절했다.

영훈은 다래를 따가지고 이미 들렸댔다고 말하기도 무엇하여 머밋거릴뿐이였다.

《성철려단장한테 핀잔해주었지만 그쯤한 양수기고장은 볼트 한두개로 퇴치할수 있는것을 설비점검을 하지 않고 부려먹기만 하다보니 그렇게 된게 아니냐. 양수공도 문제다. 전기여닫개나 겨우 다루는 햇내기를 앉혔으니 그런 고장이 생길수밖에. 난 허금호동무나 다른 사람들이 간혹 너를 두고 칭찬하면서 결함을 구태여 찾는다면 결함이 하나도 없는거라고 할 때마다 모르는 소리라고 밀막군 했지. 그런데 봐라, 요즘에만도 알게 모르게 자름자름한 허점들이 드러나지 않았느냐. 우리가 인재를 맡았으면 능력을 잘 발휘하도록 해주어야지 보통의 돌격대원으로 써먹어서야 되겠느냐. 너나 나나 경숙연구사를 잘 도와 30만산대발파를 성공에로 이끌자꾸나.》

그때까지 말없이 듣기만 하던 영훈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아버지, 제불찰이 큽니다.

앞으로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 동무는 좀 내성적이고 담이 약하여 대발파프로그람을 통이 크게 작성하지 못할가봐 우려되기도 합니다. 혹시 도중에서 주저앉기라도 하면…》

아버지가 아들의 말꼬리를 잘라버렸다.

《아니다. 담력과 용기를 키워주어 죽으나사나 제힘으로 해내야 한다는걸 명심하고 달려들게 해야지 신심을 잃으면 15년설때와 같은 오유를 범하게 된다. 그가 그렇게 된다면 우리모두의 실책이야.》

아버지의 말은 다 옳았다. 영훈은 묵묵히 긍정하면서 마디마디 새겨들었다.

철정은 아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긴듯 했다. 그러다가 문득 용단을 내려 얼마전부터 하고싶었던 말을 꺼내였다.

《영훈아, 난생 처음으로 네앞에서 이런 말을 해본다. 새겨듣거라, 내 지금껏 다녀보았지만 경숙연구사만 한 처녀는 흔치 않더구나.

내 눈이자 네 눈이겠지.》

영훈은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지레짐작하고는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아버지말씀은 옳습니다. 그러나 그건 안됩니다. 그 동문 앞으로 20대, 30대의 교수, 박사가 되여야 할 나라가 중시하는 인재입니다.

그는 리상이 실현되기 전에는 시집가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런 인재를 일찌기 가정에 붙잡아둔다는건 죄되는 일입니다.》

(허, 그거 심각한 인생철리로군.)

철정은 혀끝에 오른 이런 말을 미소로 지워버리며 천천히 수긍했다.

《알겠다, 알겠어. 끝없이 날고픈 젊은 시절의 지향을 이 늙은게 막을번 했구나. 그럼 이 이야기는 없었던것으로 치자.

하지만 채심할것은 이후로 경숙연구사한테 관심을 더 돌려주거라.》

《아버지, 명심하겠습니다.》

영훈이 대답을 마치기도 전에 려단직일관이 문을 열고 보고했다.

《책임자동지, 법동대대에서 온 대원이 기다리고있습니다.》

철정은 시간을 보고나서 말했다.

《그 친구 빨리도 왔구만. 들여보내시오.》

직일관이 나가자 로철정이 영훈에게 설명했다.

《30만산대발파전투장에 직관원으로 쓸 인재를 물색한다면서? 내가 얼마전에 파악한 친구가 하나 있길래 저녁전에 보내달라고 했더니 때맞추어 나타났구나. 붓글솜씨랑 보고 키워서 쓰려무나.》

《그래요?!》

영훈은 무척 반가와했다.

인차 나들문쪽에서 손기척이 울렸다.

들어오라고 하자 목이 헐끔하고 몸이 겨릅대같은 친구가 뚱뚱한 배낭을 진채 불쑥 들어서면서 허리를 굽석하고 인사했다.

그러던 그는 뒤늦게야 돌격대식경례를 붙이느라 배낭을 벗어놓으며 허둥댔다.

《안녕하십니까? 돌격대원 손철남 명령대로 왔습니다.》

절과 거수경례를 두루 섞어가면서 서툴게 례절을 표시한 법동농민의 증손자는 구면인 책임자에게는 곰살가운 눈웃음을, 초면인 로영훈에게는 얼떠름한 인상을 지어보였다.

《잘왔다. 앞으로 30만산대발파전투장의 정치사업을 맡을 시려단 정치부장이다.》

로철정은 손철남에게 로영훈을 소개해준 뒤 아들에게는 철남을 소개해주었다.

《이 친군 유명한 법동농민의 증손자다.》

《아, 그렇습니까!》

영훈이 반가와하자 손철남은 좀 거북해했다.

《거기 의자에 편안히 앉소.》

철정은 철남의 배낭을 벗게 한 다음 의자에 앉게 했다. 철남은 무슨 용무로 자기를 대렬조동까지 시켰는지 어서 알고싶어 큰 눈을 두릿거렸다.

《30만산돌격대가 조직된다는 소릴 들었겠지?》

《들었습니다.》

《거기에 가고싶지 않나?》

철정의 물음에 손철남은 화약에 달린 불마냥 확- 하고 타올랐다.

《가고싶었습니다. 정말입니다.》

《가선 뭘한다?》

《시키는 일이면 뭐나 다 할수 있습니다. 남자가 아닙니까.》

영훈은 남자라고 으시대는 모양이 우스워 빙그레 웃음지었다.

자기가 정치부에 왔다는것을 깨달은 철남은 꾀바르게 주어섬겼다.

《정치사업도 할수 있습니다. 선동이면 선동, 직관이면 직관, 대대에선 제 붓글씨가 괜찮다고들 합니다.》

《옳아, 바로 그거야. 내가 현장을 돌다가 보니 법동대대에 새로운 붓글선수가 나타났길래 누군가 알아두었댔지.

자, 오늘 하루종일 직관원감을 물색하다가 허탕친 정치부장앞에서 한번 솜씨를 보여라.》

로철정이 이르자 영훈은 얼른 선전화구와 붓, 종이를 내주었다.

철남은 영훈이 내놓은 붓을 곁눈질로 슬쩍 바라보더니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자기의 뚱뚱한 배낭에서 기다란 붓주머니를 찾아내였다. 꺼내놓은 붓이 한묶음이나 되였다. 넙적붓, 왕붓, 중붓에다가 탄력있는 족제비꼬리털로 만든 가늘고 뾰족한 붓에 이르기까지 규격별로 빠진것이 없는것 같았다.

철남은 영훈이 펼쳐놓은 련습지에다 색감을 듬북 묻힌 왕붓을 제법 호기있게 휘둘러대였다.

그때마다 멋부린 자획들이 선명하게 살아났다.

큰글, 중간글, 작은글 등을 여러가지 형식의 필체로 쓴 철남은 《이만하면 어떻습니까?》 하고 물어보듯 영훈을 바라보았다.

아직은 썩 세련된 필체가 못되였다. 획들이 까불랑대거나 균형이 맞지 않고 글씨크기가 고르지 못했다. 하지만 현장에서 얼마간 숙련되면 괜찮은 직관원이 될것 같았다.

《그만하면 괜찮아. 직관선동글씨는 족자글씨와는 달라. 자획이 힘있고 바르게, 직관성과 군중성이 있어야 해. 하여튼 우리 함께 일하면서 더 배우자구.》

영훈은 철남에게 이야기한 뒤 아버지에게는 인재를 발굴해주어 고맙다는 인사말을 드렸다.

로철정이 영훈에게 의미있는 눈길을 보내였다.

《인재도 이렇게 가까이에서 찾아가지구 써야 한다니, 허튼데서 꾸어올 생각은 말구.》

로영훈도 크게 생각되는바가 있었다.

영훈은 손철남과 함께 식당에 가서 저녁밥을 먹었다. 그런 뒤 성철려단장과 토론하여 철남을 신동진네 소대에 배속시켜 생활하도록 하면서 필요한 때마다 직관선전에 인입시키게 했다.

손철남도 자기는 동무들속에 있는게 더 좋다면서 직관사업이 제기되면 한밤중에도 불러달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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