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5(2016)년 3월 18일
《생명》

제 1 장

4

그들이 왔다간 뒤 로철정은 한동안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처럼 정열적으로 달리던 사람이 어쩌면 이다지도 맥없이 주저앉으려고 하는걸가.

철정은 허금호가 그렇게 된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고싶었다. 모든것이 어렵고 긴장한 때에 그를 잘 이끌어주지 못한탓이 아닐가.

원래 허금호는 자존심을 귀중히 여기는 인간이였다.

그랬던 허금호의 자존심은 어데로 자취를 감추어버렸는가.

철정의 머리속에는 문득 고난의 행군시기의 일들이 떠올랐다.

로철정의 기계공장과 허금호네 철제일용공장은 멀지 않게 자리잡고있었다.

고난의 행군에 직면하자 두 공장은 다같이 계획을 미달하게 되였다.

중요한 원인은 동력난이였다.

그런데 시일이 지남에 따라 두 공장의 처지는 점차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시당위원회나 시인민위원회에서 계획수행총화를 하는 날이면 로철정은 자주 주석단에 오르게 되였고 허금호는 비판무대에 나서는 때가 드문하였다.

로철정이 공장주변으로 흘러가는 작은 시내에 소형발전소를 하나 건설한 때로부터 모든 기대들은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던것이다.

그는 이듬해에는 구내에다 소형풍력발전소를 하나 더 건설하여 모자라는 동력을 보충하였다.

기대들이 돌아가자 련관된 공장, 기업소들과의 거래도 활성화되여 난문제들이 하나, 둘 풀리게 되였다.

시에서는 로철정의 자력갱생의 정신을 본받기 위한 사업도 조직하였고 우는소리를 하면서 앉아뭉개는 단위들은 자주 비판도 하면서 기계공장처럼 자체로 일어설것을 요구했다.

허금호는 도저히 로철정을 흉내낼수 없었다.

어느날 로철정을 찾아간 허금호는 자존심을 눌러버리고 교차생산조직으로 짬짬이 전기를 조금씩 도와줄것을 간청하였다.

철정은 그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그러나 생산된 전기량이 두 공장의 수요를 충족시킬수 없었으므로 원만히 보장해줄수가 없었다.

결정적인 해결책은 허금호네도 소형수력발전소를 건설하는것이였는데 그는 선듯 발벗고나서지 못하였다. 그런 일을 어떻게 자기네같이 작은 철제일용공장에서 하겠는가 하는것이였다.

주저하는 사이에 몇달이 지나갔다.

철정은 허금호의 결심으로는 도저히 자그마한 수력발전소 하나 일떠세울수 없다는것을 간파하였다.

그는 즉시 허금호를 찾아갔다.

단독으로 하기 어려우면 기계공장에서 도와줄테니 공동으로 건설하되 전기는 전량 철제에서 쓰라고 했다.

허금호는 그때에도 자존심을 꾹 누르며 로철정의 아량을 너그럽게 받아들였었다.

정작 전기가 생산되였을 때 금호는 그것을 반반씩 나눠쓰자고 했다.

그러나 철정은 자기네 공장은 자체생산한 전기면 넉넉하다면서 철제에서 다 쓰라고 했다.

허금호는 공연히 볼을 불구면서 불만을 표시했다. 상대를 도와주면서 대방의 자존심을 고려하지 않는것은 멸시나 다름없다고 했다.

그래서 철정은 하는수없이 형식상 철제의 전기를 약간씩 받아쓰는체하지 않을수 없었다.

후에 금호는 자기의 자존심을 존중해준데 대하여 철정에게 감사를 표한적이 있었다…

그런즉 이제와서 그의 자존심을 존중해준다면 그의 요구를 고분고분 다 들어주어야 한단 말인가. 아니, 그럴수는 없었다.

로철정이 허금호의 일로 밤깊도록 고뇌에 지쳐있는데 밖에서 화물차 멎어서는 소리가 났다.

뒤이어 안해인 박정금과 아들 영훈이 들어왔다. 그들은 저녁에 도병원에 갔다가 되돌아온 길이였다. 정금은 마침 동에서 보내는 지원물자를 가지고왔다·

안해와 아들은 철정의 수척해진 모습을 보자 퍼그나 근심어린 표정을 지었다.

《에그 성미두 원, 허금호아주버니랑 있는데 맘 푹 놓고 며칠 입원해계실게지. 이렇게 훌쩍 퇴원했다가 병이 도지면 어찌려구 그래요?》

안해의 말에 철정은 전혀 반응을 하지 않았다.

영훈의 거동은 어머니와는 달랐다.

그는 아버지의 고충이 무엇이며 어째서 아버지가 며칠동안 병원침상에 누워있는것을 마다하고 달려오지 않으면 안되게 되였는가를 알고있었다. 영훈은 아버지의 모습을 애타게 바라보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아버지는 안변청년2호발전소를 완공한 후에 얼마동안 치료를 받았어야 할걸 잘못하지 않았습니까?》

철정은 한동안 대답을 못하였다.

안해앞에서 그리고 아들앞에서 자기의 심정을 조금도 숨김없이 그대로 하소연하자니 은연중 심사숙고하게 되였다.

《솔직히 말해서 나도 무쇠덩이는 아니다. 보통사람들과 다름없는 인간이지. 건강도 건강이지만 모든 일이 점점 더 어려워지니 어깨의 짐을 벗어놓았으면 하는 생각이 전혀 없은것도 아니다.

언젠가 내가 새로운 공법을 도입하자고 했을 때 시공책임자 허금호동무가 이렇게 말했었다.

<책임자동무, 내남없이 환갑을 넘긴 사람들인데 처신을 잘해야 하오. 환갑을 넘기면 인생의 파란곡절을 다 겪은 철든 사람으로 여기는데 철없이 놀면 손가락질이나 업수임을 받게 되는건 당연한 일이요. 모든걸 신중하게 타산해야지 좋다고 덮어놓고 다 받아들이는게 아니요.>

그래서 난 주춤거리며 새 공법을 포기해버렸었지.

그게 오히려 철부지사고였어.

이제와서 보면 우리의 건설이 더디여지는건 첫째도 둘째도 공사량이 많고 부족한게 많아서가 아니라는게 더욱더 절실히 느껴지는구나. 하늘이 무너져도 무조건 제힘으로 해내야 한다는 각오, 이걸 해내지 못하고서는 하늘로 머리들고 살수 없다는 자각을 지니지 못한 사람들이 아직도 우리 주위에 남아있기때문이야.

돌이켜보면 생각이 많다.

내가 그때 위대한 장군님께 한시간나마 안변청년2호발전소에 대하여 해설해드렸을 때 그이께서는 만점짜리 설명을 들었다고 그처럼 기뻐하셨지. 난 그 치하를 잘못 리해했어. 나의 기술지식에 대한 평가로 말이야. 사실은 그보다도 우리 도가 자체의 힘으로 수력발전소를 일떠세운데 대한 평가였던걸. 그런데 아직 적지 않은 일군들은 위대한 장군님의 평가를 잘못 리해하고있어.

우리가 이처럼 어려운 때 제힘으로 일떠설 생각보다 우에서 손잡아 이끌어주어야만 일어설 생각을 앞세운다면 나라가 어떻게 되겠니.》

철정의 이야기를 듣는 그의 안해와 영훈은 수척해진 겉모양과는 판다르게 결곡하고 대바른 그 모습에서 저으기 안도감을 느끼는것이였다.

영훈은 기침을 가까스로 참으면서 하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의미심장하게 들었다.

영훈은 그제서야 생각난듯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 시공책임자동지가 조군실공업대학에 발전소모의건설을 의뢰한건 알고계십니까?》

철정은 듣느니 처음이였다.

《난 모르고있었는데 시공책임자동무랑 얼마나 안타까우면 그런노릇을 하겠니.

콤퓨터모의건설을 통해서 걸린 문제들의 출로를 찾고싶었는지도 모르지.》

철정은 별다르게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영훈은 좋게만 생각할수 없었다.

경숙의 말을 들어보아도 모의건설의 의도가 심상치 않았다.

발전소건설이 몇년이나 걸리겠는가, 30만산대발파가 가능한가 하는것들을 이제와서 구태여 알아본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하늘이 무너진다 해도 무조건 해내야 하는 일들이 아닌가.

그러나 영훈은 자기의 속생각을 서둘러 내비치지 않았다. 앓는 몸에 건설장의 일때문에 커다란 심리적부담을 안고있는 아버지에게 구태여 그런 시름거리를 안겨주고싶지 않았던것이다.

영훈은 아버지에게 다소나마 기쁨될 일을 상기시켜 기분을 전환해드리고싶어 경숙의 문제를 이야기했다.

《아버지, 경숙동무도 조만간 여기로 나오겠다고 했습니다.》

로철정도 기억을 되살리며 기뻐했다.

《전국대학생콤퓨터프로그람경연에서 1등을 했다는 연구사 말이냐?》

《예.》

《그것 참 좋은 생각을 했구나. 본인에게도 좋고 우리에게도 큰 도움이 되겠는데. 살펴보면 우리 도안에도 그런 수재들이 있는걸 나부터도 눈밝혀 찾아내여 쓸 생각을 하지 못했거던.》

로철정은 한편으로 자책하면서도 기뻐마지 않았다.

오랜만에 가정이 모여앉아 이야기를 주고받다보니 시간이 퍼그나 흘러 돌격대 부업조에서 기르는 수닭울음소리가 꼬끼요- 하고 이른새벽의 대기를 흔들었다.

이미전에 영훈은 그 수닭에 흥미를 가진적이 있었다. 알낳이닭이나 기르지 무엇때문에 실리없이 수닭을 기르느냐고 물었더니 부업조장이하는 말이 수정알을 받아서 병아리를 깨우고 다른 한편으로는 새벽에 식당근무를 깨우기 위해서라는것이였다.

음, 생활이 자리잡히고 째여가는구나.

그때 영훈은 하루살이식이 아니라 생활의 래일까지를 설계하며 자신의 힘으로 모든 필요한것들을 창조해내려는 그들이 미더웠고 고마왔었다.

닭울음소리를 들은 박정금이 자기도 이제 내려가면 곧 닭상자에 알낳이닭을 넣어 기르겠다고 하였다.

《옳소. 당신도 오늘은 돌격대에 올라와서 배운게 적지 않소. 자력갱생이란 나라에서만 하는게 아니구 모든 단위, 매 가정에 이르기까지 생활을 개척해나가기 위해서 철칙으로 삼아야 할거란 말이요. 당신두 늘 그래왔던것처럼 살림을 깐지게 하면서 건설장에 보탬되는 일을 많이 해주오.》

《그래야지요.》

정금은 남편의 말을 마음속에 깊이 새기며 공손히 대답하였다.

철정은 자기가 한 말을 되새기는듯 덤덤히 앉아있었다. 그는 고난과 시련을 제힘으로 헤쳐온 지난날을 영훈에게 이야기했다.

…로철정은 일제가 태평양전쟁에 한창 광분하고있던 때에 태여났다. 파도소리가 들릴듯싶게 멀지 않은 곳의 바다가 농촌마을에 그의 태가 묻혔다.

마을앞으로는 작은 시내가 돌돌돌 흐르고 뒤에는 나지막한 산들이 있었다.

철정의 아버지는 얼마 되지 않는 서덜밭과 천수답 몇마지기를 소작으로 부치면서 근근히 생계를 이어갔다. 철정이 한살나던 해에 아버지가 왜놈들과 지주놈의 학정에 뼈가 휘도록 일하다가 병마에 지쳐 쓰러졌다.

아버지를 여읜 뒤 그의 어머니가 온 집안을 먹여살려야 했다. 철정의 애어리고 잔약한 어깨에는 힘에 부친 짐바가 늘 지워졌다. 그는 여섯살때에 벌써 모내는 어머니를 도와 고사리같은 두손에 모춤을 쥐고 매끄러운 논뚝길을 위태로운 비틀걸음으로 걸어다녀야 했다.

철정은 미제가 불지른 전쟁의 포화속에서 어렵게 공부를 했다. 시련의 나날이였으나 연필을 잡자마자 교원들로부터 앞날이 촉망되는 수재라는 인정을 받았다.

전쟁이 끝난 페허속에서 어른들이 벽돌장을 추어내여 교사를 일떠세울 때 누가 시키지 않았건만 아이들도 건설장에 달려나왔다.

철정은 누구보다 무겁게 벽돌짐을 졌고 앞장에 서서 힘겹게 걸으면서도 구구표를 외웠다.

아버지 없이 어머니의 슬하에서 누구에게도 기대지 말고 제힘으로 모든 일을 해내야 했던 자립성이 그를 다른 애들보다 억세게 만들었다.

생활은 어려웠으나 그의 꿈은 현란했다.

처음으로 그가 해보고싶은것은 글짓는 일이였다.

그는 날마다 지나온 생활과 머리속에 떠오른 생각들을 일기장에 담았고 담임교원의 방조를 받아 동화와 동요를 몇편 지어서 《소년신문》과 《아동문학》잡지 같은데 발표하기도 했다. 그 나날 점점 자신이 생겨 글쓰기에 정신이 팔렸다.

그가 소학교시절에 쓴 동화 《담벽과 담쟁이》가 《아동문학》잡지에 발표되였다. 동화의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았다.

…담쟁이는 거무틱틱한 담벽을 기여오르면서 말한다. 보라, 내가 있어 너의 보기 싫은 벽면이 푸르고 아름답게 단장되지 않았느냐고.

담벽은 대답한다. 그대 아무리 푸르싱싱하고 아름답다고 해도 이 담벽이 없으면 어디에 의지하여 살아가리요?

담쟁이는 그만에야 아무런 대꾸도 못하고 묵묵히 담벽을 장식했다고 한다.…

비록 손바닥만 한 크기의 지면에 발표된 소박하고 미숙한 글이였지만 온 학교의 교원, 학생들이 너도나도 앞을 다투어가며 읽었다.

전후 재더미를 헤치고 어린이들도 달려나와 자기들의 배움터를 일떠세우는 부모들을 돕던 시대상이 그대로 비껴진 글이여서 더 호평을 받았다. 간혹 동무들이 힘에 겨워 어른들의 두손을 쳐다볼 때면 그는 말하군 했다.

《애들아, 우린 담쟁이처럼 남에게 업혀사는 모양이 되지 말자꾸나.》

《옳아, 학교를 짓는데 우리의 힘도 보태자.》

아이들은 이구동성으로 화답했다.

점차 학년이 높아지면서 그는 천문학과 수학, 물리학을 비롯한 수다한 책들을 탐독하였다.

철정은 문학과 함께 자연과목에서도 상당한 수준의 실력을 발휘하였다.

학교에서는 그가 중학교를 졸업하게 되자 함흥건설건재전문학교에 추천해주었다.

학과에 전념한 보람이 있어 그는 전과목 최우등으로 졸업하였다.

그무렵 어데서나 긴요하게 찾는것은 건설부문의 기술인재였다. 얼마 안되는 건설부문 학교의 졸업생들을 국가계획위원회가 직접 파견하던 때였다.

강원도에 배치할 대상을 놓고 상급단위에서는 매우 심중하게 론의하였다.

전쟁의 피해를 제일 많이 입은 강원도야말로 졸업생들이 은근히 가기를 꺼려했다. 때문에 상급에서는 강원도에 갈 동무들은 자원적으로 나와달라고 했었다.

로철정이 신중한 생각끝에 자기가 가겠다고 자청하였다. 하여 그는 재더미만 남은 전연도에 전후 첫세대의 건재기계기술자로 파견되여갔다. 그는 강원도에 자그마한 벽돌공장을 일떠세우는것으로 사회생활의 첫걸음마를 떼였다.…

철정은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간곡히 뇌이였다.

《아버지는 지금껏 오직 자기의 두손과 머리로 당에서 준 임무를 다 수행해왔다.

내 너에게 하고싶은 말은 오직 제힘으로 자기 앞길을 개척해나가라는거다. 간부인 아버지나 친척의 힘을 믿거나 간부들에게 잘 보여 아첨을 하고 먹을알있는 자리를 따려고 해서는 안된다. 명심해라. 그런 사람의 일생은 실패한다는걸.》

로철정의 이야기는 아들을 리해시키였다.

《알았습니다, 아버지!》

아들은 병사시절에 그랬던것처럼 군말없이 대답하였다.

《참, 네가 이번 길에 돌격대원가족들의 살림형편까지 돌아보고왔다니 고맙구나. 그래 성철려단장의 집에는 들려보았니?

사람이 영 뚝하고 말은 없지만 속은 뜨거운 사내야. 안해가 허리를 못쓰는 영예군인이라는구나. 늘 관심해주어야 한다.

성철려단장은 일밖에 몰라. 집에는 한달에 한번도 안 간다더라. 문밖출입도 힘들어하는 그의 안해가 오죽 외롭겠니.》

《아버지, 저도 알고있어요. 이번에 들려야 했는데 빈손이 돼서 가보지 못했어요. 려단장동지는 가정일에 대해서는 통 말이 없으니 그런 사연도 얼마전에야 알았답니다. 제 인차 들려보겠습니다.》

《오냐, 그래라.》

로철정이 잠시 사업실무적인 생각에서 머리를 돌린 틈에 박정금이 조용히 뇌이였다.

《여보, 경란이 결혼식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사돈집에서는 빨리 날자를 받자고 벌써 여러차례나 재촉을 해왔답니다. 전 그때마다 남편을 만나서 의논하겠다고 말해보내군 했어요.》

딸의 혼사문제가 눈앞에 박두한 때에 박정금의 근심을 누구보다 잘 알고있는 철정이였다.

그는 남편의 눈치를 보다가 모처럼 말꼭지를 떼였을 안해의 심정을 외면할수 없었다.

경란은 막내딸이였다.

그는 안변청년2호발전소건설때 함께 일하던 총각과 눈이 맞아 혼약이 되였는데 외아들인 남자네 부모들이 인차 잔치를 하자고 조른다는것이였다.

《여보, 이제 압력관로설치공사며 30만산지향성대발파와 같이 어렵고 복잡한 공사들이 목전에 뒤엉켜있는데 그게 성사되기 전엔 이 아버지가 몸을 빼지 못하오. 그러니 사돈들도 그렇게 리해를 시켜서 얼마쯤 뒤로 미루면 안되겠소?

그리구 지금 당장 잔치를 차린다고 해도 어려운 때에 누구한테다 구차하게 손내밀겠소. 당신이 워낙 재간이 있으니 닭도 댓마리 기르고 닭알도 모아 잔치준비를 착실히 해놓소.》

철정이 절절하게 말했다. 안해가 밉지 않게 눈을 흘기며 남편을 칭원했다.

《에그 세심하기란, 큰일하는 사람이 그런 말씀을 다하시우. 그러니까 사람들이 당신을 자막대기니 꼭자라느니 하는 대명사로 부른대요. 사람들과의 관계도 좀 부드럽게 가지고 그들의 의견도 참작해야지 콤퓨터처럼 조금도 에누리가 없구 기업관리도 너무나 깐지게 한다고 콤 령감이란 소리까지 듣게 됐어요.》

《여보, 헤픈 녀인의 바가지꼭지가 부러지기 쉽소. 집살림이나 나라살림살이나 깐지고 아껴서 허실없이 해야지 제 주머니돈이 아니라고 나라돈을 망탕 허비하면 어찌겠소. 난 그 소리들이 다 싫지 않구려.》

정금은 남편의 옳은 말에는 늘 묵묵히 수긍하였다. 그는 이제 헤여지면 남편과 언제야 만날지 모를 처지여서 아들이 앞에 있는것도 개의치 않고 영훈의 대상자문제를 입에 올렸다.

《여보, 영훈의 나이도 벌써 서른이 지났구려. 색시감도 하나 골라야 하지 않겠어요.

아들이 집을 떠나있으니 대상자도 나타나지 않아요. 당신이 관심을 돌려서 괜찮은 처녀 하나 물색해보시우.》

철정은 그 말에는 관심을 가지고 반응하였다.

《참,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는 말이 있지. 내가 맞춤한 대상을 하나 골라보아야지. 돌격대에 훌륭한 처녀들이 많으니까.》

《아버지, 지내 조급해마십시오. 건설이 끝난 다음에도 늦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저도 아버지 못지 않게 지식을 쌓은 담에 가정을 이루겠어요.》

사실 영훈이가 아버지를 부러워하는 측면의 하나가 그의 다방면적이며 막힘없는 실력이였다.

흔히 사람들은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는 말에 비유하여 아들도 높은 실력가일것이라고 단정했지만 아버지를 따르기에는 아직 멀었었다.

때로 설계실이나 종합분과에 여러가지 자료들을 얻어보려고 달려갔던 일군들은 정전이나 다른 요인으로 콤퓨터를 기동시키지 못할 때에는 철정을 찾아가군 했다.

그는 일반상식에는 물론 문학예술에도 상당히 조예가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로철정을 가리켜 《우리 도의 종합콤퓨터》라고 했고 어떤 사람들은 《걸어다니는 도서관》이라고도 했다.

영훈은 전쟁시기와 전후복구건설의 어려운 때 아버지가 어떻게 그처럼 해박한 지식의 기초를 쌓을수 있었는지 의문스러울 때가 많았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업과 생활을 깊이 들여다볼 기회가 많아지면서 의문이 점차 풀리였다.

선천적인 수재형의 두뇌에도 물론 원인이 있었지만 잠을 모르는 꾸준하고 진지한 탐구가 그런 비상한 지성의 인간을 만든것이였다.

영훈은 아버지의 체온이 좀 내려가고 기침이 멎자 마음이 한결 놓이였다. 그래서 오랜만에 아버지에게 한담을 들려주어 기쁘게 해드리고싶었다.

《아버지, 제가 얼마전에 자동차를 타고오면서 들은 얘기 하나 해드릴가요?》

《무슨 얘긴지 들어보자꾸나.》

아버지가 아들을 정겹게 마주보며 수긍하자 어머니도 느슨히 미소를 머금고 이야기를 기다렸다.

…영훈이가 올라탄 공사장차는 눅눅한 저녁대기가 차겁게 스며든 마식령골짜기로 접어들었다.

험산속에 메아리치는 자동차의 발동소리만이 한적한 수림속의 정적을 몰아내며 우릉거렸다.

지금껏 목청을 돋구어 노래를 불러대던 돌격대원들은 이제는 목이 갈려버렸는지 잠자코 앉아서 발동소리가 일으키는 메아리에 귀를 기울이고있었다.

그 침묵이 지루했던지 어느 재간있는 이야기군이 느물거리며 입을 열었다.

《세월을 딱히 가늠하기 어려운 오랜 옛적이였지.

원산이나 문천쪽에서 태줄을 끊은 장사군들은 말잔등에 길마를 얹고 마른 미역이나 염한 고등어따위의 해산물을 잔뜩 싣고는 이 산골짜기로 난 가파로운 오솔길을 올라 법동이나 판교 같은 무서운 산속마을에 들어가서 콩이나 록두, 팥 같은 값진 곡물과 바꾸어왔다더군.

원산 송도원 솔밭어름에 변변치 않은 장사군이 하나 살았는데 어느해 늦은 가을날 그는 말잔등에다 갖가지 해산물을 무겁게 지워가지고 령길에 접어들었네.

때는 첫서리가 내린 마가을이였다고 하네. 오불꼬불한 외통길로 가파롭게 뻗어올라간 령길은 끝날줄을 몰랐지. 령마루는 아득한데 사위는 괴괴한 정적속에 어둠이 깃들었네. 저녁무렵부터 마가을 찬비가 추륵추륵 내리면서 번개가 벙긋거리고 우뢰가 꽈르릉 메부리들을 짓부실듯 요란하게 들리였다네. 그러더니 한밤중부터는 우박이 쏟아지고 우박은 다시 눈으로 변하였네. 말도 지치고 사람도 허기졌지. 령길은 오를수록 험산이라 눈이 얼어붙어 말은 엉금엉금 갈지자걸음을 하다가 주르르 미끄러지기를 그 몇번…

추위속에서도 말은 온몸을 땀으로 흥건히 적시며 쓰러져 네발을 버둥거렸네. 말을 쉬여가지고 령을 넘어야 했는데 남들보다 먼저 가서 한밑천 잡아볼 생각으로 냅다 몰았던탓이였지. 땀을 흠씬 흘리고 맥이 진해서 일어날념을 못하고있는 말곁에 모닥불이라도 피워서 몸을 녹여주어야 하는건데 주인은 제힘으로 나무를 찍자니 엄두가 나지를 않아서 사방에 대고 고함을 쳤다누만.

<게 누가 없소? 여기 와서 날 좀 도와주.>

사방 무인지경이라 대답하는이도 없었거니와 제 손을 싸매들고 우는 소리하는 사람을 누가 제일처럼 도와주었겠나.

땀이 식자 온몸이 얼어든 말은 네굽을 버둥거리다가 그만에야 절명해버리고말았다네.

오도가도 못하게 된 주인은 너무도 억이 막혀서 눈물을 비오듯 흘리였지. 지나가던 길손들이 고등어짐이라도 져다주기를 바라서 해종일 기다렸으나 누구 하나 나타나지를 않았네. 후세사람들은 말을 반드시 쉬여서 넘어가야 한다는 의미에서 말 마자에 쉴 식자를 붙여서 마식령이라고 불렀다는거요.》

이야기를 마친 제대군인청년은 《동무들, 난 압력관로건설장으로 가는 신동진이요. 앞으로 알고들 지냅시다.》 하고 호기있게 자기를 소개하였다.…

아들의 이야기를 자초지종 듣고난 로철정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의미있게 말했다.

《제힘은 쓰지 않고 남의 손만 바라는 바보들이 겪게 되는 비극이 비껴있는 의미심장한 얘기로구나.

우리도 교훈을 찾을 필요가 있어.》

철정은 자신에게 다짐을 주듯 조용히 뇌이였다.

《옳습니다, 아버지. 그런데 말입니다, 난 그 친구가 이야기의 마지막을 지어서 붙인것만 같애요.》

《음, 그럴수도 있겠지. 제힘으로 자기 운명을 개척해야 한다는걸 강조하느라고 그랬을수 있어. 그 청년은 정말 훌륭하고 영민한 돌격대원이로구나. 이야기에 씨알을 박아넣을줄 알거던.

흔히 사람들은 말도 쉬여넘는 령이여서 마식령이라는 식으로 단순하게 알고있는데 말이지.

압력관로건설장에 나가서 한번 만나보아야지.》

로철정은 한결 개운해진 인상으로 말했다.

《자, 이젠 얼굴들을 그만치 마주보았으면 자기 위치로 돌아들 가야지.》

철정은 가족들에게 활기띤 모습을 보여주려고 일부러 벙글서 미소를 지어보이였다.

《이봐요, 제발 몸조리를 잘하세요.》

지금껏 이야기에 흥심이 없이 병색이 짙은 남편의 얼굴만을 바라보던 박정금이 근심을 털어버리지 못한 인상으로 당부했다.

《맘놓소. 건설장의 일이 잘되면 나도 건강해진다우.》

철정은 흔연히 미소를 지으며 안해와 아들을 밖으로 내보내였다.

철정은 이튿날도 열이 내리지 않았다.

하지만 사방에서 그를 찾는 일감이 너무도 많아 그저 누워있을 형편이 못되였다.

하루종일 바깥바람을 맞으며 현장을 나다녔더니 밤에는 열이 더해지면서 그를 침대에 이끌어다 쓰러눕혔다.

한동안 공사일때문에 고심하느라고 잠에 들지 못했다. 자정이 지난 깊은 밤에야 그는 꿈속에서 헤매였다.

…그는 온통 깜깜나락인 원산시가지 복판에 나섰다. 가로등도 없고 공장, 기업소의 정문에조차 불빛 한점 없다. 아빠트창문들은 벌거우리한 초불이나 석유등빛에 희미하게 알아볼수 있었다.

캄캄한 어둠속에서 아이들이 개똥를 넣은 호박꽃으로 앞길을 밝히며 그를 찾아와 두팔에 매달리며 졸라댄다.

《할아버지, 할아버진 우리한테 전기를 보내준다고 약속하구선 자꾸만 앓으시면 어떡하나요.

우리가 자갈이랑 더 많이 깨고 파철도 많이 모아보낼테니 전기를 빨리 보내주세요.》

《오냐, 그러자꾸나.》

그가 기특한 애들의 머리라도 쓰다듬어주자고 손더듬을 했으나 애들은 벌써 어데론가 어둠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그는 공사를 빨리 진척시키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안고 마식령쪽으로 가고있었다 .

그무렵이였다.

평양쪽하늘이 희붐해지더니 시내중심으로 뻗어간 행길복판이 자동차전조등빛으로 눈부시게 밝아졌다. 승용차는 깊이 잠든 도시복판을 지나 철령산줄기가 높이 솟아있는 남쪽방향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철정은 그 순간 후두두 몸부림치는 심장의 드높은 박동을 의식했다.

그는 다름아닌 어버이장군님의 야전차를 띄여본것이였다.

미제침략자들의 새 전쟁도발책동으로 정세는 일촉즉발의 초긴장상태로 치달아오르고있었다.

조국과 인민의 운명을 한몸에 지니신 어버이장군님께서는 사회주의수호전의 기치를 높이 드시고 이밤 최전연초소로 달려가시는것이였다.

철정은 한없이 솟구치는 송구스러움을 가까스로 달래이며 종주먹을 부르쥐고 장군님의 야전차를 따라 달려갔다.

그는 그이께 불꺼진 시가지를 보여드린 죄책감을 누를길 없어 울먹이며 말씀드렸다.

《장군님! 반드시 우리 힘으로 발전소를 일떠세워 미국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겠습니다.》

그러자 멀리 철령쪽하늘가에서 그이의 우렁우렁한 음성이 산울림을 하며 울려왔다.

《로철정동무! 나는 동무들을 믿소. 지난 조국해방전쟁때처럼 모두가 전투원이 되여 자력갱생으로 원산청년발전소를 반드시 일떠세우리라고 믿소!》…

꿈에서 깨여난 철정은 자리를 차고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는 장군님께서 무시로 넘나드시는 철령쪽하늘을 우러러 오래도록 서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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