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송원 리상벽에 대해 알고싶습니다
문 - 고국에 리상벽이라고 하는 이름난 방송원이 있다고 알고있습니다. 주체조선의 력사와 함께 걸어온 이름난 방송원으로 알고있는데 그에 대한 더 자세하고 정확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리진숙 - 중국 장백조선족자치현 - 독자)
답 –
선생은 1924년 3월 함경북도 부령군에서 막벌이군의 맏아들로 태여났습니다.
일찍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를 따라 산전막에서 살다보니 그는 7살이 되도록 똑똑한 말 한마디도 배우지 못하였습니다. 집이 너무 가난하여 보통학교도 다닐수 없었던 리상벽선생은 나라를 빼앗긴 민족의 설음을 피눈물속에 통절히 느끼며 왜놈들에게 강제징집되여 고역까지 치르어야 했습니다.
선생은 해방이 되여서야 비로소 성진방송국(당시)의 방송원이 되여 해방조선의 새 소식을 우리 말로 마음껏 전하는 기쁨을 맛보게 되였습니다.
건국운동의 앞장에서 씩씩한 목소리로 인민들을 힘차게 격동시키고있던 선생은 1947년 12월부터 평양중앙방송국(당시) 방송원으로 일하게 되였습니다. 처음에 그는 체육방송을 맡아했는데 사람들은 경쾌하면서도 기백이 있고 활동적이면서도 침착한 그의 목소리를 무척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그는 자기가 쥐고있는 마이크의 무게를 다는 알수 없는 23살의 애젊은 청년이였습니다.
그러던 리상벽선생은 인생의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게 되였습니다.
주체38(1949)년에 선생은
그 사랑, 그 믿음을 안은 리상벽선생은 조국해방전쟁시기 종군방송원으로서 주체39(1950)년 6월 28일 서울이 해방되였을 때 서울방송을 보장한것을 비롯하여 전쟁 전기간 전시방송을 보장하는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그후 리상벽선생은 주체55(1966)년 7월 영국 런던에서 진행된 제8차 세계축구선수권대회때 세계축구계에 혜성처럼 나타나 천리마조선의 기상을 높이 떨친 우리 나라 축구선수들의 격동적인 경기장면을 현지에서 실황중계함으로써 조국인민들에게 크나큰 기쁨을 안겨주었습니다.
선생은 1960년대에 창조된 방송야회를 비롯하여 방송음악회, 좌담회 등 여러가지 형식의 공개방송들에서 사회자로서 방송을 재치있게 진행하였을뿐아니라 평양에서 진행된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개페막사회도 훌륭히 보장하였습니다.
선생은 평양을 중심으로 한 조선문화어방송화술을 공고발전시키고 보도, 실황중계, 정론, 교양기사, 론평 등 방송형식에 따르는 종목별화술형상창조에도 기여하였습니다.
그는 또한 높은 창작적열정을 가지고 시와 가사, 수필, 희곡 등 많은 문예작품들을 써서 출판물에 내였습니다.
리상벽선생은 《방송화술론》을 비롯하여 《화술통론》, 《말하기》, 《조선말화술》, 《방송원화술》 등 많은 책들을 집필하여 주체적방송화술과 조선말화술리론을 연구체계화하는데 이바지하였으며 평양연극영화대학 겸임교원으로서 화술강의에 자주 출연함으로써 방송원후비를 양성하는데 기여하였습니다.
공화국창건을 선포하는 현지방송으로부터 우리 조국 력사에 큰 흔적을 남긴 모든 중요사변들은 대부분 그의 육성을 통하여 세상에 공개되였으며 우리 혁명의 영광스러운 년대들에 격조높이 울려퍼진 그의 목소리는 높은 정치적안목과 뛰여난 화술기량이 안받침된것으로 하여 커다란 설득력과 감화력을 가지였고 매번 세상에 큰 메아리를 일으켰습니다.
선생은 화술기량에서 누구도 따를수 없는 독특한 자기의 세계를 개척하였을뿐아니라 시, 가사, 희곡, 영화문학, 수필, 기행을 비롯한 100여편의 문학작품들을 창작발표하였으며 주체83(1994)년에 예술학 박사의 학위를 받았습니다.
일본어, 영어, 프랑스어도 류창하게 한 그는 정구, 롱구, 축구, 배구, 탁구 등 체육에서도 재능을 보인 다정다감하고 다재다능한 방송원로였습니다.
이렇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