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얼마전 나는 우리 아빠트에 새로 이사온 한 동포의 집에 놀러가 집구경을 하고 사진첩을 보았어요. 그 과정에 그 집의 부부가 고국을 방문하였을 때의 사진도 보았습니다. 그중에는 석왕사에서 찍은 사진도 있었어요. 석왕사와 그 주변경치가 얼마나 멋있던지 기회가 있으면 꼭 가보려고 합니다. 석왕사에 대한 소개를 부탁합니다. (왕소아 – 재중 - 대학생)
답 - 석왕사는 강원도 고산군 설봉리에 있는 고려말-조선봉건왕조시기의 절입니다.
고려말인 1386년에 처음으로 응진전이 세워졌다고 합니다. 그후 조선봉건왕조시기에는 불교보다도 유교가 성행한것으로 해서 불교사찰들은 대체로 조락하였지만 석왕사에서만은 이 시기에 50여채가 넘는 크고작은 건축물들이 건설되였다고 합니다.
석왕사일대는
주체36(1947)년 9월 29일
석왕사는 동쪽으로 트인 깊은 골짜기에 남향한 두개의 기본구성축을 이루면서 건물들이 지형에 맞게 조화롭게 배치되였습니다.
웃쪽의 건축군은 응진전을 기본으로 하여 이루어진것이고 아래쪽의것은 대웅전을 기본으로 하여 이루어진것입니다.
석왕사로 들어가는 첫문은 불이문입니다.
불이문은 석왕사앞으로 흐르는 개울에 건너놓은 무지개모양의 돌다리우에 세운 아담한 다리집으로서 1751년에 세운것입니다.
조계문은 석왕사의 두번째문인데 지금의것은 1783년에 고쳐지은것입니다.
이 문은 4각돌기둥을 좌우에 하나씩 놓고 그우에 흘림식나무기둥을 세운 다음 커다란 합각지붕을 올린것으로서 바깥 7포, 안 9포로 짜올린 두공은 일주문의 특색을 돋구어줍니다.
천정은 한간짜리건물이나 소란반자와 빗반자를 댔으며 봉황, 룡, 비천 등을 그려 화려하게 장식하였습니다.
조계문을 지나면 서쪽방향으로 합각지붕의 날씬한 2층다락인 설성동루가 있습니다.
석왕사의 중심구역에 이르러 아래중심축 북쪽 깊숙이 대웅전이 자리잡고있습니다.
대웅전은 1731년에 고쳐지은것으로서 석왕사의 중심건물이였습니다. 그러나 조국해방전쟁시기 미제의 야만적인 무차별폭격으로 불이문, 조계문, 설성루, 룡비루, 인지료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석왕사건물들이 타버렸습니다. 대웅전은 정면 5간(18. 6m), 측면 3간(11. 1m)에 바깥 9포, 안 11포의 겹처마합각지붕건물이였습니다.
제공밑에는 련꽃봉오리를 조각하고 우에는 룡대가리조각을 하였으며 대웅전안의 포는 집안높이에 어울리게 장식적으로 두단을 덧붙여 마치 13포로 보이게 하였습니다.
이 건물에는 화려한 금단청을 입히고 문살들에 기하학적무늬를 섬세하게 새겨 건물전체가 화려한 조형예술품처럼 단장되여있었습니다.
대웅전안에는 부처를 그린 그림들이 걸려있었고 9개의 부처가 놓여있었습니다.
대웅전앞에는 호지문이 서있었고 그앞에 영월루가 남향하여 서있었습니다.
그리고 대웅전을 중심으로 동쪽에 만궁당, 서쪽에 심검당이 마주서고 만궁당쪽으로 무상당, 흥복당, 설성동루가 있었으며 심검당에 련이어 해장원, 팔상전, 명부전, 보명당, 문한각들이 자리잡고있었습니다.
석왕사의 웃쪽중심축 북쪽에는 이 절간의 기본건물의 하나였던 응진전이 있었습니다.
고려말기의 건물을 대표하는 응진전은 비교적 높이 쌓은 기단우에 정면 5간(15. 77m), 측면 2간(6. 4m)에 안팎 5포의 긴 배집이였습니다.
두공의 제공은 비교적 짧게 하고 안에는 중보높이에 소란반자를 높이 댔으며 전반적으로 화려한 단청이 입혀져있었습니다.
응진전안에는 석가여래상을 중심으로 500라한상이 놓여있었습니다.
우리 당의 민족유산보호정책에 의하여 조국해방전쟁시기 대부분 타버린 석왕사의 대웅전, 심검당, 응진전을 비롯한 유적건물들이 력사주의적원칙에 맞게 원상대로 훌륭히 복원되였습니다.
응진전앞에는 룡비루와 인지료가 가지런히 서있습니다.
석왕사는 고려말기로부터 조선봉건왕조시기에 이르기까지의 우리 선조들의 우수한 건축술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유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