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 서예가인 나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명필가들의 필치를 연구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내고있어요. 언제인가 할아버지에게서 고국의 력사에 《3대명필》의 한사람으로 이름을 떨친 한호라는 사람이 있었다는 말을 들은적이 있습니다. 당시 주변나라 사람들도 그의 글씨를 얻어가지고 제나라로 가서 친구들과 친척들에게 자랑까지 하였다고 하던데 그에 대한 소개를 부탁합니다. (림수 – 재중 - 대학생)
답 – 그는 16세기 후반기(1543-1605)의 유명한 서예가 한호입니다. 자는 경홍 호는 석봉, 청사입니다. 그는 우리 민족이 낳은 유능한 서예가였습니다. 한호는 이름보다도 석봉이라는 호로 더 잘 알려졌습니다.
한석봉은 개성의 가난한 선비가정에서 태여나 1567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가평군수 등의 벼슬을 지냈습니다.
어려서부터 글씨에 뛰여난 재능을 가지고있었으나 집이 몹시 가난하여 종이와 붓을 구할수 없었으므로 밖에 나가서는 돌다리나 땅바닥에, 집에 들어오면 사기그릇에 글을 쓰면서 글씨공부를 꾸준히 하였습니다.
한석봉의 어머니는 어떻게 해서라도 공부를 잘 시켜 아들을 훌륭한 사람으로 키우리라 결심하고 9살에 10년을 기약하고 외가켠으로 친척벌되는 글방훈장댁으로 보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을 훌륭한 사람으로 키울 일념으로 늙어가는것도 힘든것도 잊어버리고 부지런히 일하였습니다. 특히 석봉의 어머니는 떡만드는 일을 특별히 잘하였다고 합니다.
한편 어린 석봉은 어머니가 고생하는것을 생각하면서 글씨공부에 전심전력을 하였습니다.
이런 이야기도 전해져오고있습니다.
7년째 되던 해에 자기의 글씨솜씨가 어느 명필한테도 지지 않을것이라고 자부한 석봉은 이만하면 어머님의 소원을 풀어드릴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오래간만에 아들을 만난 어머니는 기뻤으나 아들의 글씨수준을 검열해보아야 하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날밤 석봉의 어머니는 등불을 끄고 어둠속에서 아들에게 글을 쓰게 하고 자기는 떡을 썰어 누가 익숙한가를 시험해보기로 하였습니다. 이윽고 불을 밝히고 서로 비교하여보니 어머니가 썬 떡은 어느것이나 차이가 없이 크기가 고른데 석봉의 글씨는 획이 고르지 않을뿐더러 크기도 같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보게 된 석봉은 어머니가 정성껏 마련해준 학비를 가지고 성실하게 노력하지 못한 잘못을 깊이 뉘우치는 한편 자신의 글씨쓰기능력이 모자라는것을 부끄러워하였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그는 글씨를 더 배워 품어온 소원을 이룰 결심을 하고 이름난 명필을 찾아가 글씨공부를 꾸준히 하였습니다.
글씨공부에 노력한 결과 그는 해서, 행서, 초서, 액자의 글씨를 쓰는것 등에서 묘리를 체득하였으며 당대 명필로서 명성이 높아지게 되였습니다.
그가 명필로서 세상에 이름을 날리게 되자 조선봉건국가에서는 외국사신을 영접할 때에는 항상 그를 사자관으로 참가시켰으며 외교문서를 작성할 때에는 그에게 글을 씌우군 하였습니다.
그가 얼마나 글씨를 잘 썼던지 당시 주변나라 사람들은 《석봉의 글씨는 왕희지, 안진경과 더불어 서로 우렬을 다툴것이다.》라고 감탄하였습니다.
다른 나라의 이름난 한 학자도 석봉의 웅건한 필치가 《마치 노한 사자가 바위를 까부시는것 같고 목마른 천리준마가 샘물로 내닫는것 같은 기백을 보여준다.》고 찬탄하였습니다.
우리 나라에 왔던 이웃나라의 한 유명한 장수도 한석봉의 글씨를 얻어가지고 제나라로 가서 친구들과 친척들에게 자랑을 하였다고 합니다.
한석봉의 글씨를 찬양하여 옛 시인은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잔 글자는 신묘하고
큰 글자는 기이해
긴 창과 날선 검
삼엄하게 벽에 찼네
금시라도 벼락내려
적장을 내려칠듯
이를 보신 군왕은
만면에 기쁨일세
이처럼 한석봉은 우리 나라 서예의 새로운 장을 새겨놓았습니다.
한석봉은 지난 시기 우리 나라에서 김생, 김정희와 더불어 《3대명필》로 불리운 뛰여난 서예가였습니다.
현재 그의 필적을 묶은 《석봉필적》, 《석봉서법》과 해설로 된 《천자문》, 전서, 해서로 된 《서화담신도비》 등이 전해지고있습니다.